[정창곤의 窓 6] 꿈에라도 잊지 말아야 할 경술국치·을사늑약

역사 속의 8월29일은 많은 사건과 의미를 가지는 날이다.

오대양 집단 변사사건(여사장 등 32명, 용인공장서 동반자살 시체로 발견)이 있었고 한국노총과 가수 마이클 잭슨이 출생한 날이며, 소련 최초로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한 날이기도 하다.


그러나 가장 큰 사건이며 분노할 수밖에 없는 우리나라의 상처, 바로 경술국치일이기에 더욱 이날은 큰 의미로 다가온다.  

경술국치(庚戌國恥)! 1910년 8월29일은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국권을 상실한 치욕의 날이다. 일제가 대한제국에게 통치권을 일본에 양여함을 규정한 한일병합조약을 강제로 체결, 이를 공포한 날이다.

일제는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한 것에 대해 자신들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한일합방(韓日合邦), 한일합병(韓日合倂) 등의 용어를 썼었다. 국권피탈(國權被奪)이라고도 했다.

​앞서 1910년 8월22일,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합병조약(合倂條約)이 강제로 체결되었고 대한제국의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조약을 통과시켰으며, 8월29일 조약이 공포되어 대한제국은 국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미 1905년 11월17일 을사늑약 이후 실질적 통치권을 잃었던 대한제국은 이러한 경술국치로 5년 만에 일본 제국에 편입되었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것이다.

경술국치의 시작은 근본적으로 을사늑약에서 비롯되었기에 근래에 많은 이들이 을사늑약과 경술국치 날짜를 혼동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이 같은 현상이 역사를 잊어가는 국민적 현상은 아닐까 몹시 우려되기에 다시 한 번 상기하는 의미로 을사늑약에 대해 짚어 보고자 한다.  

일제는 지리적·군사적 요충국가인 대한제국에 야욕을 가지고 공작을 펼친 결과 1904년 2월23일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고, 그해 5월 대한방침(對韓方針)·대한시설강령(對韓施設綱領) 등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로 편성하기 위한 새로운 정책을 결정한다.

이어서 그 해 8월22일에는 제1차 한일협약(한일외국인고문용빙에 관한 협정서)을 체결, 재정·외교의 실권을 박탈하여 우리의 국정 전반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한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열강의 묵인을 기회삼아 대한을 침탈하려는 계획을 수립하는데, 먼저 1905년 7월27일 미국과 태프트·가쓰라밀약을 체결하여 사전 묵인을 받았으며, 8월12일에는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하여 양해를 받았다.

이어서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9월5일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맺은 러시아와의 강화조약에서 어떤 방법과 수단으로든 한국정부의 동의만 얻으면 한국의 주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보장을 받게 되었다.

상황이 전개되자 대한제국 내에서도 위기감이 높아져 조정에서도 경계하였지만, 1905년 11월 일본 추밀원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고종 위문 특파대사(特派大使) 자격으로 한국에 파견, 한일 협약안을 대한제국정부에 제출하게 하였다.

11월9일 서울에 도착한 이토는 다음날 고종을 배알하고 "짐이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사를 특파하니 대사의 지휘를 따라 조처하길 바란다"라는 내용의 일본 왕 친서를 봉정하며 일차 위협을 가했다. 뒤이어 15일에 다시 고종을 배알하여 한일 협약안을 들이밀었는데, 내용이 매우 중대한 사안이라 조정의 심각한 반대에 부딪혔다.

이틀 뒤 17일에는 어전회의가 열렸으며, 이날 궁궐 주위 및 시내의 요소요소에는 무장한 일본군이 혹시 모를 민중의 붕기를 우려하여 경계를 섰다.

무력시위의 방편으로 헌병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온 이토는 다시 회의를 열고, 대신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하여 조약체결에 관한 찬부를 물었다.

이 회의에 참석한 대신 가운데 한규설과 민영기는 조약체결에 극구 반대했다. 한편 이하영과 권중현은 소극적인 반대의견을 내다가 권중현은 변심하여 나중에 찬의를 표했다. 다른 대신들은 이토의 강압과 위협에 굴복하여 낯 뜨겁게도 약간의 수정을 조건으로 찬성 의사를 밝혔다.

이날 밤 이토는 결국 조약체결에 찬성하는 대신들과 다시 회의를 열고 자필로 약간의 수정을 가한 뒤 위협적인 분위기 속에서 조약을 승인받기에 이른다.

이토 히로부미에게 동조한 박제순·이지용·이근택·이완용·권중현 5명이 조약체결에 찬성한 대신들로서, 이를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 대대손손 불리게 된다.

조약 첫머리에 "한국정부 및 일본국정부는 양 제국을 결합하는 이해공통의 주의를 공고히 하고자 한국의 부강의 실(實)을 인정할 수 있을 때에 이르기까지 이를 위하여 이 조관(條款)을 약정한다"고 했다. 참으로 낮 뜨거운 일이다.

이 조약에 따라 한국은 외교권을 일본에 박탈당하여 외국에 있던 한국외교기관이 전부 폐지되고 영국·미국·청국·독일·벨기에 등의 주한공사들은 공사관에서 철수하여 본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듬해인 1906년 2월에는 서울에 통감부가 설치되고, 조약 체결의 원흉인 이토가 초대통감으로 취임하는데, 통감부는 외교뿐만 아니라 내정 면에서까지도 우리 정부에 직접 명령, 집행하게 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보호라는 명분아래 사실상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이후 대한제국은 어떠했는가?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폭력이 비일비재했으며 붉은 댕기 조선 여인들은 정신대로, 청년학도들은 전쟁터에서 총알받이로, 노동력이 있는 사람들은 군수물자를 만드는 산업체에서, 또는 탄광에서 짐승처럼 살아야 했다.

농민들은 피땀 흘려 지은 농산물을 군량미와 일본인들의 창자를 채우기 위해 공출을 강요당하며 모든 소출을 빼앗기고 기아 속에 먹을 것을 찾아 산과 들을 헤매었다.

조국이 없으면 가족도 마을도, 자신도 민족도 없다며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이국 만리길을 떠난 항일독립투사들은 눈보라 치는 만주벌판을 지나 백두산 넘고 압록강 건너 혈전 만리의 길을 걸으며 피로써, 죽음으로써 삼천리금수강산을 품에 안으며 해방의 노래를 불렀다.

이것이 을사늑약, 경술국치의 결과다.

현대의 한국과 당시의 상황이 비슷해 보이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한국 땅, 그것도 서울 한 복판에서 국회의원들의 환영을 받으며 창설 기념식을 치르는 일본자위대. 최근 일본 육상자위대는 북한의 SLBM 등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을 핑계로 최신 10식 전차와 아파치 헬기를 동원해 강력하고 공격적인 화력연습으로 열도를 뒤흔들며 동북아의 긴장 수위를 높였다.

이번 자위대의 화력시범에는 관람허용 인원의 29배인 약 14만명이 신청해, 일본 국민들의 관심정도를 알 수 있었는데  북한의 SLBM 발사등 최근 북한의 위협이 이번 연습에 반영됐냐는 질문에 육상자의대의 한 관계자는 "특별히 북한을 상정한 것은 아니지만 유사시 영토 탈환이라는 전술 시나리오대로 훈련을 진행하고 있다"고 답했다. 사실상 아무 거리낌 없이 한국을 통과해 북조선을 공격하는 데 주력하는 훈련임을 알 수 있다.

이날 훈련을 관람하는 관람객에게 배부된 안내서에 이나다 도모미(稻田朋美) 일본 방위장관은 인사말을 통해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안보정세가 복잡하게 변해감에 따라 유사시를 대비한 자위대의 적극적인 책임감을 의식한다"고 강조했다.

오카베 도시야(岡部俊哉) 육상막료장(육군 참모총장)은 "일본을 둘러싼 중국, 북한, 러시아 등의 군사력 강화로 불안전 요인이 커져가고 있다"면서 "적용가능한 적의 군사억제력을 발휘하기 위해 '강력한 육상자위대 창조' 훈련에 정진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사드배치로 인해 불안정한 동북아의 정세에 살얼음판 걷는 한국의 행보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북한을 자극하고 중국과 러시아를 적대하며 한국을 물귀신처럼 전쟁을 불화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다.

북한의 위협을 핑계 삼아 미국과 손을 잡고 한국을 전진기지로 북한을 위시하여 러시아와 중국에 야욕을 드러내는 일본!

서서히 가라앉아 가는 땅과 몰아치는 태풍, 이미 핵 피폭으로 죽어버린 땅, 이런 이유로 그들은 쉽게 반도와 대륙에 대한 야욕을 버릴 수 없음은 당연하기에 과거의 야욕을 다시 재현해 보겠다는 일제의 마수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재현될지도 모를 일제강점기를 기다리며 을사오적처럼 동조해야 하는 것인가?

과거 경술국치 이후 우리 민족은 여러 형태의 저항으로 맞섰다.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발표하여 일본의 침략성을 규탄하고 조약체결에 찬성한 대신들을 공박했다. 

고종은 조약이 불법 체결된 지 불과 4일 뒤, 황실고문 헐버트(Hulburt, H. B.)에게 "짐은 총칼의 위협과 강요 아래 최근 양국 사이에 체결된 이른바 보호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한다. 이 뜻을 미국정부에 전달하기 바란다"고 당부하며 이를 만방에 선포하라고 주문했다.

이 사실이 이듬해 1월 '런던타임즈'지를 통해 알려졌다.

이뿐인가? 유생과 전직 관리들은 상소투쟁을 벌였으나 힘없는 조정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뜻있는 인사들이 죽음으로써 조국의 수호를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시종무관장 민영환을 비롯하여 특진관 조병세, 법부주사 송병찬, 주영공사 이한응, 학부주사 이상철 등의 중신과 지사들이 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으로 사태를 되돌리기엔 이미 나라의 주권회복은 시위를 떠난 화살의 형국이었다.

그런 한편, 적극적이고 과감한 투쟁에 떨쳐나선 이들도 있었으니, 충청도에서는 전 참판 민종식이, 전라도에서는 전 참찬 최익현, 경상도에서는 신돌석이, 강원도에서는 유인석이 각각 의병을 일으켰다. 이근택·권중현 등을 암살하려는 백성들 개인 테러행위도 일어났다.

그와 함께 구국계몽운동도 활발하게 펼쳐졌다.

유교와 기독교 등의 단체들이 표면상으로는 문화운동을 표방하며 국민의 계몽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산하에 비밀결사를 두고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지금도 회자되는 각종영화들과 드라마에서 그들은 살아있으며 우리들에게 말한다.


조국에 힘이 없으면 백성과 후손들이 피를 흘리기에 이를 되돌리고자 우리는 목숨을 버리며 싸웠노라고!

32세 활짝 핀 꽃으로 산화한 안중근. 민족의 원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재판에서 당당하게 이토의 죄를 물으며 산화한 그가 우리에게 묻는다.

저들 일제에게 또 속지는 않느냐고!

그런 마음에 경술국치와 을사늑약은 혼동해서도 안 되지만, 함께 되새겨야 할 일이기도 하다. 국치일에 기하여, 그런 마음으로 아래 참담했던 을사늑약 본문을 되새겨 본다.


-일본국정부와 한국정부는 양 제국을 결합하는 이해공통의 주의를 공고히 하고자 한국의 부강의 실(實)을 인정할 수 있는 때에 이르기까지 차 목적(此目的)을 위하여 좌의 조관(條款)을 약정함.

제1조 
일본국정부는 제동경 외무성을 경유하여 금후에 한국이 외국에 대하는 관계 및 사무를 감리(鑒理) 지휘할 것이요, 일본국의 외교대표자 및 영사는 외국에 있어서의 한국의 신민(臣民) 및 이익을 보호할 것임.

제2조 
일본국정부는 한국과 타국간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하는 임무에 당하고 한국정부는 금후에 일본국정부의 중개에 경유치 않고서 국제적 성질을 가진 하등의 조약이나 또는 약속을 하지 않기를 상약(相約)함.

제3조 
일본국정부는 기(其)대표자로 하여금 황제폐하의 궐하(闕下)에 일명의 통감을 설치하되, 통감은 전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경성에 주재하고 친히 황제폐하에게 내알하는 권리를 유(有)함.
일본국정부는 또한 한국의 각 개항장급, 기타 일본국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역에 이사관(理事官)을 설치하는 권리를 유하되.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 하에 종래 재 한국 일본영사에게 속하던 일체의 직권을 집행하고 아울러 본 협약의 조관을 완전히 실행하기 위하여 필요로 하는 일체의 사무를 장리(掌理)할 것임.

제4조 
일본국과 한국과의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 및 약속은 본 협약에 저촉되지 않는 한 모두 다 기 효력이 계속하는 것임.

제5조 
일본국정부는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하기를 보증함. 
우를 증거로 하여 하명(下名)은 각 본국정부에서 상당한 위임을 수(受)본 협약에 기명 조인함.
                                 
광무 9년 11월17일 외무대신 박제순(朴濟純)



정창곤 편집장 begabond57@daum.net                                          2016.08.29  입력

[정창곤의 窓 6] 꿈에라도 잊지 말아야 할 경술국치·을사늑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