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결국’ 경제전쟁을 일으켰다. 일본 아베 정권이 28일 통관 절차 간소화 혜택을 주는 ‘백색국가’(그룹A·전략물자 수출심사 우대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개정 수출무역관리령을 끝내 강행했다.

과거 침략사를 둘러싸고 일본이 공세적인 건 처음이다. 과거사 갈등이 경제·무역 갈등으로 확대된 것도 이전에 없던 일인데, 이젠 한술 더 떠 안보 분야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과거사를 둘러싼 한-일 간 근본적인 시각차의 충돌이며, 향후 남북 화해냐 대결이냐의 갈림길에서 벌어지는 갈등이다. 이미 벌어진 싸움이니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지소미아)은 박근혜 정권이 졸속으로 체결해 동북아와 한반도 냉전체제, 남북 대결 분단을 고착시킨 협정이라며, 이제라도 정부가 종료를 선언한 것을 환영한다.

문재인 정부는 지금 기로에 섰다. 안전한 길을 버리고 명분과 자존을 택했다. 거의 올인 베팅을 한 셈이다. 올인 베팅에서 이기려면 궁극적으로 우리 패가 강해야 하고, 지금 강하지 않으면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지인이 SNS에 '아베야 고맙다'는 글을 올렸다. 아베 신조가 경제 보복에 나선 것을 계기로 한·일 역사, 경제 등 지금껏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됐고 깨달음을 얻어 역설적으로 아베에게 고마워한다는 내용이었다.

2020도쿄올림픽 조직위원회는 올림픽 공식 사이트 지도에 표시된 독도를 지우지 않겠다고 한다. 지난해 2월 평창동계올림픽 때 한반도기에 독도가 표시된 것에 대해 ‘올림픽 정신에 반 한다’고 주장했던 자신들 논리를 뒤집은 것이다. 당시 한국은 일본 측 요구를 대승적 차원에서 수용했으나 일본은 그 선의를 거칠게 돌려줬다.

일본 아베 정권이 28일 백색국가 제외 조치를 강행하여, 식품과 목재를 제외한 대다수 품목이 포괄허가에서 개별허가 대상으로 바뀌었다. 이제 한국에 전략물자를 수출하는 일본 기업들은 일일이 개별 허가를 받거나 까다로운 '특별 일반 포괄 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 여파로 대일 의존도가 높은 우리 기업들의 생산이 차질을 빚거나 아예 중단될 수 있어 우려가 크다.

백색국가 제외 조처로 한국에 전략물자를 수출하는 일본 기업들은 3년 단위로 한번만 심사를 받던 데서 앞으로는 개별허가를 받는 식으로 훨씬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 <아사히신문>이 “양국의 민간경제가 상처를 입는 소모적인 상황이 됐다”며 두 나라 정상 간 회담을 촉구한 배경이다. 아베 정부는 경청해야 할 것이다.

일본의 대한(對韓) 수출 절차가 대폭 강화되면서 한국 기업들은 언제 어떤 품목이 개별심사 품목으로 지정될지 알 수 없는 불확실성에 직면하게 됐다. 일본의 무역보복을 위한 제도적 장치 세팅이 끝남에 따라 한일 갈등은 장기화 국면에 접어들었다. 한국 산업 전반에 커다란 불확실성을 드리워 비열한 행태다.

일본 측에서는 추가 보복 조치로 관세 인상, 송금 규제, 비자 발급 기준 강화 등을 검토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최악의 시나리오에 면밀히 대응하되 장기적 안목으로 우리 산업의 경쟁력을 키우는 것이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키는 길이다.

한일 대립이 이어질 경우, 향후 개별허가 품목 지정 등을 통해 반도체ㆍ디스플레이 외에 석유화학, 공작기계, 2차 전지 소재 등 159개 품목 수입에서 타격이 우려되고 있다. 특히 일각에선 국내 엔 캐리자금 청산, 현대중공업의 대우조선 인수 반대, 한국 농수산물에 대한 비관세장벽 강화 등 금융ㆍ농수산물ㆍ조선업 구조조정 등에 걸친 보복 조치까지 예상하고 있다.

성장하는 한국 중추 산업을 좌초시키려는 뻔한 의도의 경제제재는, 54년 전 한일청구권협정을 통해 민간차관과 기술력으로 무장한 일본 기업에 엄청난 새 시장을 만들어준 일과 일맥상통한다. 그 덕분에 일본의 무역흑자는 수교 후 무려 6046억 달러에 달하고 지금도 매년 약 250억 달러씩 넘겨주고 있다.

‘국제적 분업체계’는 선린으로 상호이익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 경제종속을 의도하거나 무기화하려는 상대국이라면 상황이 다르다. 일본의 대(對) 한국 수출규제가 국내 반도체 산업을 겨냥한 노림수라는 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에, 일본 경제 보복으로 우리 반도체 기업들도 비상이 걸렸지만, 수출길이 막힌 일본 반도체 소재 기업들도 매출 하락 때문에 타격이 불가피해졌다.

1990년대만 해도 세계 시장을 사실상 독점했던 일본 반도체 기업들은 20여년 만에 쇠락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최 상위권을 차지한 반도체 매출 순위에 일본 기업들은 10위권 밖으로 밀려난 상태다.

동아시아 패권을 차지하겠다는 아베의 대전략의 걸림돌 중 하나가 한국의 반도체 산업이라는 시각도 있다. 4차 산업혁명으로 수요가 늘고 있는 반도체 산업에서 한국에 밀릴 경우 한일 경제력이 역전될 수 있고,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베의 전략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국 기업들이 전 세계 메모리 반도체 공급량의 60%를 책임지는 상황에서 삼성전자가 133조원을 들여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도 1위를 하겠다는 목표를 밝히자 일본의 위기감이 극에 달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밥맛 좋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1980년대 한국은 일제 ‘코끼리 표’ 전기밥솥 열풍이었다. 한 중소기업이 천연곱돌로 만든 속 솥과 압력조절부를 뚜껑에 장착한 독창적인 기술의 ‘쿠쿠 압력밥솥’을 내놓았다. 출시되자마자 공전의 히트를 쳤고 많은 중소기업들의 제품 출시와 특허 출원이 이어져 시장 규모도 대폭 커졌다. 지금은 스마트밥솥으로 진화해 원조인 일본에 수출되고 중국과 동남아 사람들이 갖고 싶은 1위 상품이 되었다.

우리 정부가 1990년대 수입처 다변화 정책, 2001년 ‘소재·부품기업법’ 제정, 2010년 ‘10대 소재 국산화 프로젝트’ 등 정책을 추진했지만 그때뿐이었고, 오랜 관성으로 비용과 리스크가 큰 기술개발 투자보다 다시 일제에 손댔다.

고도의 기술력이나 지식재산권까지 걸린 부품·소재를 개발하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정부와 대기업의 역할과 책임성이 중요하다. 기술력 있는 중소기업이 부품·소재를 개발하거나 국산화해도 수요자인 대기업이 사주지 않아서 사장되고 심지어 회사가 문을 닫기도 한다. 대기업, 부품·소재기업과 정부가 함께 기술개발과 납품 협약을 체결하여 개발과 생산에 전념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어줘야 한다. 전략품목을 중심으로 중소·중견기업의 국산 소재·부품을 의무구매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도 필요하다.

선진 경제대국으로 진입하려면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는 부품·소재산업은 포기할 수 없다. 국민들도 일제·일본여행 불매운동으로 함께 참여하고 응원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와 대·중소기업 등 핵심 경제주체들은 뒤떨어진 부품·소재 기술개발을 위한 규제개혁과 지원체계를 구축하고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생태계를 만드는 프로젝트를 속도감 있고 강력하게 펼쳐야 한다.

7월 4일의 1차 보복 조처(3대 품목 수출 규제) 뒤 여러 차례 지적했듯, ‘일본의 수출 규제는 역사 문제와 연계됐다’는 점에서 부당하며 국제 규범에도 어긋난다. 수출관리 방식의 변경일 뿐이라는 아베 정부의 주장과 달리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보복이라는 것’은 일본 언론조차 기정사실로 여기고 있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 이날 기자회견에서 “적정한 수출관리를 위한 것”이라면서도 한국에 징용 문제 해결을 촉구한 데서 이는 다시 명백해졌다.

일본 정부는 호혜적이어야 하는 국제 교역질서를 정면으로 위배했다. ‘전략물자 통제 시스템은 한국이 일본보다 훨씬 치밀하다’는 게 국제적 평가에서 확인됐고, 삼권분립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부가 사법부 판결에 개입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본은 우리의 백색국가 제외 철회 요구를 철저히 묵살해 왔다. 한국이 수입한 일본 소재·부품을 적성국가로 유출시킨 듯한 ‘안보상의 이유’를 들었으나 지금까지 어떤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는 일본 정부다.

‘한국의 전략물자 통제가 허술하다’는 일본 쪽의 주장도 거짓임이 일찌감치 드러난 바 있다. 지난 5월 미국 비영리 연구기관인 과학국제안보연구소(ISIS)가 세계 200개 국가의 통제 실태를 평가한 결과, 한국(17위)이 일본(36위)보다 우수하다고 밝힌 게 한 예다.

청와대도 이날 일본의 조처에 강한 유감을 표명하면서 “공은 일본에 넘어가 있다”며 태도 변화를 촉구했다. 다만 일본은 이날한국 수출 때 개별허가를 받아야 하는 품목을 확대하는 ‘확전’ 조처는 내놓지 않았다. 한-일 관계가 당분간 냉전의 길로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일단 전환의 계기가 될 수 있는 시점으로는 10월 22일 일왕 즉위 축하식과 11월 23일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지소미아) 종료가 꼽힌다. 이때까지 접점을 찾지 못하면 대법원 판결 이후 아무런 배상도 받지 못한 채 기다려온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내년 1~2월께 압류한 일본 기업 자산 ‘현금화’에 나서게 되고, 일본이 이에 반발해 더욱 강력한 보복 조처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의 이번 조처는 ‘문재인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 한-일 외교부 장관 회담을 통한 한국 쪽의 대화 제의를 거부했다’는 점에서 두 나라 관계를 심각하게 해치는 처사다. 과거 침략사를 반성하기는커녕 힘으로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하려는 아베 정부의 태도에 개탄을 금할 수 없다.

가나스기 겐지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이 29일 서울에 와 김정한 외교부 아시아태평양국장과 만나 화이트리스트 제외 조처 시행 뒤 첫 외교당국 간 협의를 할 예정이어서 주목된다.

한-일 대화가 재개된다면 강제징용 해법에 대한 협의가 중심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한국 정부가 강제동원 문제를 모두 맡아서 해결하고 일본 기업 자산의 현금화를 막는 방법을 제안해야만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입장이 강경하다.

한국은 6월 19일에 제안한, ‘한·일 기업이 출연하는 기금을 통한 해법(1+1 해법)을 기반으로 일본과 협의를 통해 차이를 좁혀가며 다양한 요소를 포함한 새로운 해법으로 발전시켜 갈 수 있다’는 입장이다.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거부한 신일철주금(현 일본제철)과 미쓰비시 등 일본 기업의 압류 국내 자산이 현금화되는 시기를 주목하고 있다. 이들 자산이 경매를 거쳐 징용 피해자의 위자료로 지급되면 일본 정부가 추가 보복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일본 정부는 “강제징용 문제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완전히 해결됐다”고 주장하는 데 반해, 우리 대법원은 “불법적인 강제징용 문제는 민사적·재정적 채권·채무관계를 정리한 청구권협정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정반대의 판결을 내놓고 있다. 한-일 간 입장 차이가 확연해서 우선은 차이를 인정하는 건 어땠을까? 그래서 한국의 주장은 한국의 영토 안에서 효력을 갖고, 일본의 주장은 일본의 영토 안에서 효력을 갖도록 놔두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한국 법원의 압류 대상은 일본 기업의 한국 내 자산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 신일철주금의 경우 현재 압류가 가능한 자산은 제철 부산물 재활용업체 ‘피엔알’(PNR)의 지분 30%(주식 234만주)라고 한다. 설립 자본금(390억 원) 기준으로 130억 원이며, 자산총액(2018년 12월 기준 707억 원)을 기준으로 하면 235억 원이다.

이 가운데 주식 8만 1075주(약 4억원)가 압류된 상태다. 한 해 매출액 60조원이 넘는 신일철주금으로선 큰돈이 아니다. 미쓰비시는 가치 평가가 어려운 상표권과 특허권 등 지식재산권이 압류돼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한-일 관계 악화를 볼모로 정면으로 반발할 만큼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아베 정부가 한-일 관계 악화를 무릅쓰고 일본 기업에 “배상하지 말라”고 지시하며 정면충돌을 선택한 것은, 대법원 판결이 1965년 한-일 협정 체제를 흔든다고 봤기 때문인 것 같다.

“아이들에게 계속 사죄의 숙명을 짊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역사 수정주의자 아베 신조 총리에게, 1965년 체제는 기존 과거사 해결 방식의 기반이었던 만큼 양보할 여지가 별로 없었던 게 아닐까 싶다. 큰 틀에서 보면 미-소 냉전 시기 1965년 체제가 뒷받침했던 한-미-일 삼각 체제가 문재인 정부의 남북 화해·평화 정책에 의해 약화하는 것도 두고만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낙연 총리는 28일에도 ‘한일 관계의 복원을 위한 대화에 성의 있게 임하라’고 촉구했다. GSOMIA 종료 재검토에 이어 외교적 해결을 위해 거듭 일본에 손을 내밀었다. 백색국가 제외, GSOMIA 종료를 주고받은 양국이 더 이상의 강 대 강 조치를 취하지 않는 현상동결을 해놓고 실타래처럼 얽힌 사태를 차근차근 풀어 가야 한다.

문제는 일본이다. 이 총리가 제안했는데도 일본 정부와 여당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지난 7월 이후 아베 신조 총리 등 지도부의 발언을 종합해 보면 일련의 보복 조치로 한국의 항복을 받아 내겠다는 뜻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 들린다. 고노 다로 외상은 “한국이 역사를 바꿔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불가능하다”며 적반하장 격 언급까지 했다. 이번 사태의 외교적 해결을 바라는 자세라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언행을 지속하는 일본 지도부다.

한국 정부는 즉각 외교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깊은 유감과 강력한 항의의 뜻을 표하며, 즉각 철회할 것”을 촉구했다.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도 이날 오후 브리핑에서 “강한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은 29일 청와대에서 내년도 예산안 심의·의결을 위한 임시국무회의를 주재하며, 일본 정부의 백색국가(수출절차 우대국) 한국 배제 조치 시행과 관련해 “일본은 경제 보복의 이유조차도 정직하게 밝히지 않고 있다”며 “일본은 정직해야 한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문 대통령은 “일본 정부의 태도가 매우 유감스럽지만 우리는 이 상황을 능히 헤칠 수 있다”면서 “(일본은) 근거 없이 수시로 말을 바꾸며 경제 보복을 합리화하려 하고 있다”며 “일본 정부가 어떤 이유로 변명하든 과거사 문제를 경제 문제와 연계시킨 것이 분명한데도 대단히 솔직하지 못한 태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또 “과거사 문제를 대하는 태도 또한 정직하지 못하다”면서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여러 나라의 불행한 과거사가 있었고, 그 가해자가 일본이라는 건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했다. “과거의 잘못을 인정도 반성도 하지 않고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 정부의 태도가 피해자들의 상처와 아픔을 덧내고 있다”고도 했다.
 
공은 일본 쪽에 넘어가 있다. 한국 정부는 외교부와 산업통상자원부, 국무총리와 대통령까지 여러 차원에서 대화의 손을 내밀었다. 유감스럽게도 이 손을 잡으려는 일본의 움직임은 지금까지 보이지 않는다. 모욕에 가까운 무시로 일관했다. 반전이 없다면 선택지는 일본이 시작한 경제전쟁에 적극 대응하는 것뿐인데, 이는 결코 나쁜 상황인 것만은 아니다.

소재ㆍ부품의 국제 분업과 자유무역 원칙을 믿고 일본과 협업했던 우리로서는 백색국가 제외로 뒤통수를 얻어맞았으나 이번 기회를 기술 자립의 계기로 삼으면 된다. 다소 시간과 비용이 들고 일본 부품을 수입하는 기업으로선 당분간 어려움이 있어도 일본의 부당한 경제보복에 민관이 손을 잡고 지혜를 모아 대응하면 고통은 충분히 넘길 수 있다.

정부가 28일 이낙연 총리 주재로 확대장관회의를 열어 반도체, 디스플레이, 자동차, 전기ㆍ전자, 기초화학 등 100개 이상을 핵심 품목으로 지정해 연구개발에 2022년까지 5조원 이상을 투자하고 세계무역기구(WTO)에 일본을 제소한다는 대응책을 내놓았다.

'패스트트랙' 제도와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 등을 통해 빠른 기술 개발도 촉진하기로 했다. 핵심부품의 대일의존도를 극복해 향후 우리 경제에 미칠 불확실성을 낮추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지난달 일본의 경제보복 개시 직후부터 준비해 온 ‘소재ㆍ부품ㆍ장비 연구개발 투자전략 및 혁신대책’도 최종 확정했다. 대응계획은 일본 규제에 따른 수입 차질로 당장 피해가 예상되는 기업에 대한 지원책에 초점을 뒀다. 반면 소재ㆍ부품ㆍ장비산업 대책은 보다 장기적 관점에서 국내 해당 산업 육성을 위한 전략을 담았다.

정부는 지난달 2일부터 일본의 직접 수출규제를 받기 시작한 3개 소재(포토레지스트·에칭가스·플루오린 폴리이미드)를 미국·중국·유럽연합(EU) 등에서 대체 수입하는 데 드는 자금을 일괄 보증하기로 했다. 규제 대상 물품 수입 시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24시간 상시 통관지원 체제’도 가동 중이다.

관련 규제도 완화한다. 부품·소재 기업의 애로사항으로 꼽힌 화평법(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관법(화학물질관리법)의 인허가 절차에 ‘패스트트랙’을 도입하는 식이다. 핵심 부품·소재 개발에 필요한 화학물질 취급시설 인허가 신청 때 심사 기간을 기존 75일에서 30일로 단축한다.

정부는 우리 기업의불편이 얼마만큼 더 커지는지 지켜보면서 기업 피해를 최소화하는 쪽으로 정책을 계속 세워나가야 할 것이다. 당·정·청 회의에서 마련한 소재·부품·장비 육성 대책을 차질 없이 추진해 나가길 바란다. 소재를 비롯한 기초산업의 생태계를 혁신하는 일은 이번 사태와 무관하게 반드시 이뤄내야 할 과제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12일 일본을 화이트국가에서 배제한다고 발표했다. 군용 물자와 첨단 소재, 전자통신 부품 등 일본이 이번에 규제한 품목과 비슷하다. 다음 달 중 시행 예정이다.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도 병행한다.

일본의 보복 무역에 대응해 우리 정부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지소미아)을 더 이상 연장하지 않고 종료하기로 했다. 그런데 정작 한일 간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한미 관계, 더 나아가서는 동북아에서 한·미·일의 안보 협력관계를 걱정하는 이들도 있는 듯싶다.

사실 ‘한국과 일본이 GSOMIA 협정을 맺게 된 배경에 미국의 동북아 전략이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일이고, 미국이 이번 결정에 불만을 가지리라는 것도 쉬 짐작해 볼 수 있다.

최근 들어 동북아의 안정을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변수는 한·일간 무역 분쟁이다. 따라서 미국이 진정으로 동북아에서 한·미·일의 협력관계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당연히 일본의 보복 무역 조치들에서 시작된 이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 옳다. 그러나 미국의 태도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사태를 방관할 뿐이다.

외교부는 28일 오전 조세영 외교부 1차관이 해리스 대사와 면담한 사실을 공개했다. 조세영 차관이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를 외교부로 불러 GSOMIA 종료와 관련한 미국 정부의 공개적인 불만 표출을 자제해달라고 요청했다.

미국은 한국이 GSOMIA 종료를 결정한 뒤 반복적으로 “깊은 실망”, “강한 우려” 등 메시지를 내고, 급기야 27일(현지시각)에는 한국군의 독도방어훈련에도 불쾌함을 드러냈는데 이에 대해 한국이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며 제동을 건 셈이다. 한국 정부는 22일 GSOMIA 종료 결정 뒤 반복되는 미국의 불쾌감 표시가 27일 기점으로 도를 넘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정부의 GSOMIA 종료 결정이 “한-미 관계나 한-미 동맹에 부정적 영향을 주려는 목적이 아니라 한-일 관계 맥락에서 이뤄진 결정”임을 지적하며 “한-미 동맹을 차원 높게 강화”하고 “스스로 강력한 국방 역량을 갖추도록 노력”하는 차원에서 이뤄진 점도 강조했다고 한다.

한국과 미국 사이에는 ‘같이 갑시다(go together)’라는 한·미 동맹 구호와 달리 대북 정책 등 외교·안보 정책에 적잖은 괴리가 존재한다. 미국은 대북 제재를 놓고 한국이 엇박자를 낼 때 “모든 유엔 회원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제재 결의들을 이행할 의무가 있다”며 에둘러 지적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한국의 GSOMIA 종료 결정에 대한 반응은 확연히 달랐다. 동맹국인 한국의 결정에 대해 과거에 찾아보기 힘든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미 국무부는 앞서 “미국은 문재인 정부가 GSOMIA를 연장하지 않는 데 대해 강한 우려와 실망을 표명한다”(22일 논평), “우리는 한국 정부가 GSOMIA를 종료한 것에 대해 깊이 실망하고 우려한다”(25일 국무부 대변인)는 메시지를 냈고, 주한미국대사관은 공식 트위터 계정에 국무부 대변인의 발언을 한국어로 번역해 소개하기도 했다.

심지어 27일 국무부 대변인실 관계자는 25∼26일 있은 독도방어훈련을 두고 “군사 훈련의 시기와 메시지, 늘어난 규모는 계속 진행 중인 (한-일 관계) 문제를 해결하는 데 생산적이지 않다”고 <연합뉴스>에 밝혔다.

소식통의 말을 들어보면 조 차관은 해리스 대사한테 “영토 수호를 위한 연례적, 방어적 훈련”이라면서 “한-미 관계 강화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이해해 달라”고 말했다고 알려졌다.

전 세계에서 일본을 우습게 보는 유일한 나라인 우리는 최근 아베 정권의 거친 역공을 받고 있다. 아베의 도발로 촉발된 한일 분쟁에서 미국이 중립을 취함으로써 사실상 일본 편을 들고, 트럼프 대통령이 주한미군 주둔 비용을 5조 원으로 증액하라고 일방적으로 압박하고 있다.

국제정치 환경이 척박해졌기에 막연한 낙관주의에서 벗어나 현실을 깨닫고 우리 스스로를 정비할 기회가 됐다. 지난 22일 정부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종료를 선언, 정면 대결을 택하면서 위기감은 더욱 고조되고 있다.

이런 와중에 미국은 우리나라에 방위비 분담금을 무려 6배나 증액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트럼프 정부의 출범 이후로 미국은 줄곧 우리나라를 비롯해 유럽 등 여러 우방 국가들이 미국의 안보 우산에 무임승차하고 있다고 공격해 왔다. 그런데 한·일 갈등 이후 미국의 태도를 보면 우방국들의 분쟁에 무임승차하겠다는 태도를 더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미국은 일본에 농산물을 포함해 70억 달러 규모의 시장개방을 얻어냈다. 입으로는 자유무역을 주장하면서 정작 일본의 보복 무역 조치에는 눈감아 주는 대가라는 사실을 숨길 수 없다.

트럼프 대통령의 언어 습관 특징은 상대방을 칭찬하는 데 매우 후하다는 점이다. 우리 정부가 GSOMIA 협정의 종료를 결정한 직후에 트럼프는 ‘문재인 대통령은 나의 좋은 친구’라면서 ‘한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지켜보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는 또 같은 자리에서 ‘아베 총리도 자신의 좋은 친구’라고 말한다. 돈 안 드는 립 서비스를 남발하는 대가로 방위비 증액이나 시장개방을 요구해 실속만 챙겨가겠다는 뜻이다.

내년부터 적용될 11차 방위비분담 특별협정 체결 협상이 사실상 시작되었다. 제 10차 한미 협상 대표들은 지난 8월 20일 사전협의를 진행했다. 이번 방위비분담 협상의 가장 큰 문제는 트럼프 정부가 방위비분담 특별협정의 틀을 무시하고 미국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방위비분담' 기준을 만들어 한국에 강요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방위비분담은 주한미군 주둔비용을 한국이 일부 분담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 11차 방위비분담 협상에서 미국은 "미군이 제공하는 국제안보 비용 전체를 동맹국과 공평하게 분담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러면서 한미연합훈련 나아가, 호르무즈해협 호위연합체 구성이나 남중국해 항행의 자유 작전 등 미국의 세계전략 수행에 따르는 비용까지도 분담할 것을 한국에 강요하고 있다. 미국이 내년도 방위비분담금액으로 요구하고 있는 50억 달러는 이런 미국의 일방적인 기준에 맞춰 산정된 것이다.

미국은 1987년 페르시아만 해상 수송로의 안전 확보를 명분으로 한국 해군의 소해정과 승무원의 파병을 요구했다. 미국은 이듬해인 1988년에도 페르시아 만 사태의 직접 경비 2000만 달러 지원, 미 해군 항공기 정비지원, 필리핀에 대한 원조계획 참여 등을 한국에 요구했다. 하지만 한국은 이 두 요구를 다 거절하였다. 그것은 페르시아만 사태와 관련한 미국의 한국군 파병과 비용분담 요구가 한미상호방위조약 상의 한국방어 임무와 무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호르무즈해협 호위연합체 구성이나 남중국해 작전은 미국의 세계전략 차원에서 (한국 밖의) 해외주둔 미군이 수행하는 작전이다. 그런데 한미주둔군지위협정(한미소파) 제5조는 주한미군의 운영유지비에 대한 경비분담 원칙을 정하고 있을 뿐, 해외주둔미군의 운영비는 한미소파의 적용대상 자체가 아니다.

한미소파 제5조에 의하면 한국은 주한미군의 유지경비에 대해서도 단지 시설과 구역의 제공만 책임지게 되어 있고 그 외 다른 주한미군 유지경비는 미국이 전적으로 부담하게 되어 있다. 즉 호르무즈해협 호위연합체 구성이나 남중국해 항행의 자유 작전에 대한 비용분담 강요는 한미소파 제5조 위반이다.

호르무즈해협 호위연합체 구성이나 남중국해 항행의 자유 작전 등의 국제안보비용(미 세계전략 수행비용) 분담을 한국에 강요하는 행태는 방위비분담의 법적 근거인 방위비분담 특별협정 자체를 허물어뜨리고 사문화시킴으로써 미국 스스로 방위비분담의 근거를 없애버리는 꼴이기도 하다.

방위비분담금은 해마다 2000~3000억 원 정도의 미집행금이 발생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누적된 미집행 방위비분담금이 2018년 12월 말 기준 2조 원 정도에 이른다. 이는 방위비분담금이 과도한 수준에서 결정되고 있다는 뚜렷한 증거다. 미국이 그동안 방위비분담금을 운용해 수취한 이자소득도 3000억 원이 넘는다. 최근에도 미국은 연간 300억 원 정도의 이자소득을 얻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은 주한미군에 대한 직접지원 및 간접지원을 다 합치면 2015년 기준으로 미국이 부담하는 주한미군 경비보다 최소 5배 이상 많이 부담하고 있다. 이런 사실들은 방위비분담금이 이미 포화상태에 도달해 있고, 이런 조건에서 미국이 방위비분담금 대폭 인상을 요구하기에는 명분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이 방위비분담의 법적인 정의까지 부정하면서 세계전략 수행비용 분담을 한국에 강요하는 것, 방위비분담 특별협정을 위배하면서까지 작전지원 신설을 요구하는 것, 또 방위비분담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주한미군의 인건비 부담을 요구하는 것은 다 한국의 주한미군 주둔경비 분담(방위비분담)이 이미 포화상태에 이른 조건에서 방위비분담금의 대폭 인상을 끌어내기 위한 새로운 구실 찾기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군사건설비의 경우 평택미군기지 이전 완료로 그 수요가 이전보다 2000억 원 이상 감소했다. 내년도 방위비분담금은 올해 방위비분담금 1조 389억 원에서 수천억 원이 삭감되어야 그나마 한미 간 형평을 기할 수 있다. 그리고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에 관한 남북 및 북미 정상 합의로 마련된 한반도 평화정세에 부응하기 위해서도 방위비분담 특별협정은 폐지해야 한다.

한미일 3각 동맹 차원에서 GSOMIA를 바라보는 미국 입장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이번 사태의 빌미 제공은 과거사 문제를 이유로 수출규제 도발을 감행한 일본이라는 점에서 GSOMIA 종료만을 콕 집어 비난을 쏟아내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

미국은 한일 양국 간 벌어지는 일이 ‘무역’이나 ‘약속’에 관한 것보다는 누적된 ‘역사 인식’의 차이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미국이 “동북아시아에서 직면한 심각한 안보적 도전”을 한일 두 동맹과 함께 순조롭게 해소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중재가 한국에 대한 일방적인 압력과 압박으로 전개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미국은 GSOMIA 종료의 원인인 일본의 한국에 대한 백색국가 배제에 대해서는 두 나라가 갈등을 조정하길 바란다며 방관했다. 과거사를 겸허하게 반성하지 않고 삼권분립의 정신까지 이해하지 못하는 일본을 두둔하는 것이 과연 미국의 가치에 부합하는 일인지 묻고 싶다.

‘독도 훈련이 사태 해결이 도움이 되지 않고 상황을 악화시킨다’며 정부가 실시한 독도방어훈련을 문제 삼기까지 했다. 급기야는 독도방어훈련을 강화한 것을 ‘비생산적’이며 ‘문제 해결을 악화시키는’ 요소로 평가했다.

지난 1996년부터 실시해온 독도방어훈련을 두고 일본은 늘 항의해왔지만, 미국은 중립을 지켜왔다. 독도는 일본이 국제 분쟁화를 시도하고 있지만 엄연히 한국이 실효 지배하고 있는 영토다. 영토 수호훈련이라는 주권 행위를 문제 삼는 것은 정상적인 동맹 관계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국군은 그간 미뤄왔던 훈련을 광복절과 GSOMIA 종료 결정에 맞춰 실시했다. 훈련 목적에 부합하는 해병대 외에 육군 특전사가 참가한 것도 처음이다. 아무리 동맹국이라고 해도 주권국가가 자국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정례적으로 실시하는 군사훈련에까지 간섭하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하다.

미국이 독도방어훈련을 이렇게 평가한 것은 아무리 일본이 미국 경제에 여러 버팀목이 돼 준다고 해도 너무 많이 나간 것이다. 외교관계에서 지켜야 할 선을 건드는 과도한 발언일 뿐만 아니라 주권국가에 대한 부당한 간섭의 소지마저 없지 않다. 그동안 독도훈련을 문제 삼지 않다가 한-일 갈등 국면에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미국이 한국은 안중에 없고 일본만 챙긴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

청와대는 GSOMIA 종료를 선언하면서 한·미동맹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겠다고 밝혔다. 달라진 안보 현실을 반영하면서 한·미동맹을 더욱 발전시키자는 것, 이것이 한국민의 뜻이다.

미국이 앞으로도 중립을 지키겠다는 뜻이다 라면, 미국은 한국에 대해서도 더 이상 요구해서는 안 된다. 한국 정부는 일본이 보복 조치를 철회하면 GSOMIA 종료를 재검토할 수 있다고 했지만, 일본 정부는 요지부동이다.

미국이 태도 변화를 요구할 대상은 한국이 아니라 일본이다. 미국이 지속적으로 GSOMIA 복원을 요구한다면 한국민은 이를 방위비 분담금 등 동맹비용을 더 받아내려는 의도로 간주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한국민을 무시하는 처사가 될 것임을 미국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런 식으로 일본에 기울어져서는 한국과 일본이 대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공허할뿐더러 미국의 압박에 대한 우리 국민의 반발심만 키울 뿐이다. 미국은 일본을 편드는 듯한 태도를 거두고 동맹국으로서 할 일을 해야 한다.

일본은 역사적으로 위기를 해결하는 능력을 현대사에서만 두 번이나 보여주었다. 메이지 유신 시기에 선택적 변화를 추구한 일본은 '긴급 계획'으로 서구 열강의 압력을 견뎌냈다. 쇄국정책을 버렸고, 쇼군 통치와 사무라이 계급과 봉건제도를 포기했다.

그리하여 일본은 독립을 지켰고, 비 유럽권으로서는 최초로 국부와 군사력에서 서구 열강과 경쟁할 만한 국가가 되었다. 또 한 번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다. 이때도 군사 대국이란 전통과 황제의 신성이라는 믿음까지 버렸고, 민주주의와 새로운 헌법을 채택하며 수출 경제를 발전시키고 되살려냈다.

하지만 여전히 장애물이 존재한다. 일본은 전쟁을 시작한 책임을 지금까지도 줄기차게 부정하고 있다. ‘미국의 속임수에 넘어가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했고, 그 때문에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게 일본인의 전반적인 인식이다.

오히려 ‘일본은 원자폭탄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는 자기 연민에 허우적댈 뿐, 원자폭탄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더 참혹한 사태가 벌어졌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솔직히 논의조차 하지 않는다. 이렇게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고 오히려 피해 의식과 자기 연민을 강조하는 태도는 한국과의 관계 회복에 악영향을 미치고, 이는 결국 일본에 큰 부담이 될 것이다.

지난해 10월의 대법원 강제 동원 판결 같은 역사문제에 경제보복을 연동시킨 일본은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판결을 피고인 일본 기업이 받아들이면 끝날 일이었다. 판결을 부인하면서 사상 최악의 관계로 끌어온 장본인이 일본 정부다.

이렇게 빈약한 명분과 무리한 요구를 앞세운 채 한국의 신뢰 문제를 거론하는가 하면 심지어 “역사를 바꿔 쓰려 한다”는 망발까지 내놓았다. 미래지향적 관계를 만들어갈 의지가 있다면 일본 정부는 이제 멈춰야 한다. 국제 질서에 반하는 수출 규제를 철회하고 외교적 해결의 테이블에 나와야 할 것이다.

위기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기적을 만들어왔다. 산업화 민주화를 단 시일에 이뤄냈고 1998년 외환위기를 단합된 힘으로 극복한 바 있다. ‘사고를 딛고 일어선 나라’라는 비유가 있듯이 우리는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사건을 계기로 감리를 강화, 건설 분야가 업그레이드됐고, 우지(牛脂) 파동 후 식품안전 수준이 높아졌으며, 페놀사건을 계기로 환경보호가 강조되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정치 무능, 노사 갈등, 기업 적대시 문화, 대기업과 사주 일가의 갑질, 생산성 저하 등으로 나라 전체가 느슨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의 도발이라는 외부적 충격이 우리를 각성시키고 구두끈을 질끈 매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대기업들은 실력 있는 중소기업들의 기술력을 흡수하려고만 하던 구태에서 상생구조를 만들려 애쓰고 있다.

현대 민주주의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로 인정받는 스웨덴의 ‘민주주의 다양성 연구소’가 2019년 펴낸 연구보고서 <세계적 도전에 직면한 민주주의>에 따르면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민주주의를 구가하는 나라이다. 특히 인구 5천만 이상,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이상의 이른바 ‘30-50 클럽’ 선진 7개국 중에서 한국은 가장 민주적인 국가로 평가됐다.

영국, 이탈리아, 독일이 그 뒤를 이었고, 프랑스, 미국, 일본은 상위 20%에 속하는 2등급 민주주의 국가로 분류됐다. 프랑스는 극우주의자 마린 르펜의 부상, 미국은 우익 포퓰리스트 트럼프의 등장, 일본은 군국주의자 아베의 장기집권이 부정적 평가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한국 민주주의가 이처럼 높은 평가를 받은 결정적인 요인은 2016년 촛불혁명과 대통령 탄핵이다. 행정부의 수장인 대통령의 국정농단에 대해 입법부인 국회가 탄핵하고, 사법부인 헌법재판소가 ‘인용’한 일련의 민주적 절차는 한국 민주주의를 ‘삼권분립의 살아있는 교본’으로 세계에각인시킨 것이다.

그뿐인가. 한국 민주주의는 아시아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최근 홍콩 시위에서도 보듯 한국 민주주의는 이제 하나의 ‘전범’으로서 아시아 민주화 운동에 영감을 불어넣고 있다.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를 공부하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시위를 벌이는 아시아 시민들을 볼 때마다 큰 자긍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유럽에서 바라보는 시각도 그리 다르지 않다. 2016년 겨울 촛불혁명이 절정에 이른 무렵 독일의 권위 있는 시사주간지 <디 차이트>에 “이제 미국과 유럽은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배워야 한다”는 놀라운 제목의 칼럼이 실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일본 극우 집단의 군국주의 부활 야욕과 국내의 청산되지 않은 일제 잔재,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냉전세력의 반역사적이며 비민주적 인식들이 바로 잡히지 않으면 우리는 일본을 극복할 수 없다.
 
수구세력, 친일세력의 뿌리는 하나다. 세월호 참사와 5·18 민주화운동 망언을 일삼는 인사들은 한일 갈등에 대해서도 국민의 정서와 인식과는 동떨어진 극단적 인식을 유 튜브 등에서 주장하고 있다. 냉전사고와 친일의 뿌리가 같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일본이 과거사에 대한 반성 없이 역사 왜곡을 일삼는 것을 바로잡아야 하듯이 해방정국에서의 이데올로기 갈등, 제주 4.3 민중항쟁과 여순 항쟁 등을 좌익의 폭동으로 왜곡한 역사도 바로잡아야 한다. 분단과 냉전의 극복은 극일(克日, over-Japanese)과 맞닿아 있다.

일본계 미국인인 감독이 만든 영화 <주전장>은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극우세력의 주장을 비친 뒤 곧장 반박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예를 들어 수족이 구속되거나 철창 안에 갇혀있지 않았는데 무슨 강제 동원된 ‘성노예’냐고 비웃는 극우 인사의 발언 뒤로, 여성들의 자유의지가 침해된 여러 정황들과 ‘노예’라는 언어가 법적 효력을 가질 수 있다는 법학자의 발언이 뒤따르는 식이다.

방대한 정보와 치고받는 대화(처럼 편집된 각자의 인터뷰)의 끝에 다다른 영화의 결론은, 세계 시민들을 설득할 수 있는 사실을 널리 알리는 것이 일본의 우익 세력을 압박하는 효과적인 방안이며, 정치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굳이 과장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위안부가 20만 명에 달했다’는 주장이 대표적인 예다. 큰 숫자일수록 유리하다고 생각해 진위 여부를 따지지 않고 사용한 세력이 있었고, 이는 상대에게 숫자가 허위이므로 위안부 강제동원 자체가 거짓이라고 주장할 빌미를 줬다. 상호 이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19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증언은 한·일 양국에 큰 파장을 불렀다. 영화 <김복동>을 보면서 거슬리는 장면이 계속 눈에 들어왔다. ‘comfort woman.’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영어 표기다. CCTV같은 뉴스 매체는 물론 집회를 알리는 영문 플래카드에도 그렇게 쓰여 있었다. ‘일본군 성폭력 피해자’나 ‘일본군 성노예’의 영어식 표현은 눈에 띄지 않았다. ‘위안부’ 연구에서 우리 학계가 일본에 완패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뉴 라이트 학자들이 <반일 종족주의>를 내면서 파문을 일으킨다. 이들은 책과 유 튜브를 통해 일제하 강제 동원은 '허구'이고 '헌병과 경찰이 길거리 처녀를 납치하거나 빨래터 아낙네를 연행해 위안소로 끌어갔다는 통념은 거짓말'이라며 “위안부 원류는 조선시대 기생이다” “위안부 강제연행은 없었다” 등의 근거 없는 주장을 퍼뜨리고 있다.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창하고 있는 이들은 위안부 문제뿐 아니라 강제징용, 독도 영유권 등에서 일본 우익의 주장을 대변하고 있다.

한일 간 경제 전쟁이 전개되면서 우리 사회의 친일카르텔에 대한 각성이 확산되고 있다. 감정을 앞세운 무차별적인 한일갈등을 넘어서 한국이 진정한 독립국으로서 번영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방치한 왜곡된 역사관을 온전히 극복해 제대로 된 진실을 밝혀내어 바로잡는 계기가 필요하다.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 등이 쓴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이 화제라는 것도 지난날 우리 소재·부품산업의 기술독립 시도를 번번이 무너뜨린 경제주체들의 뿌리 깊은 ‘친일 종속주의’와 맞닿아 있다. 그러기에 ‘일본을 떠나서는 한국 경제가 존립할 수 없다’는 경제사대주의 망령을 벗어버리는 일은 따라잡기 어려운 기술력보다 이번 경제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요체다.

일본이 한반도에 선진 문명과 기술을 전파하고 한반도를 근대화시켰다는 주장 또한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일제가 철도, 병원, 근대식 건물 등을 건설한 것은 한반도의 자원을 효과적으로 수탈하기 위함이었지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것이나 조선인과 근대 문명의 혜택을 함께 나누는 박애주의 행위가 아니었다.

2005년 4월, 일본의 극우신문이라고 일컬어지는 산케이신문의 자매지 <세이론>(正論)이라는 잡지에 한승조 전 고려대 교수(정치학)가 ‘친일행위가 바로 반민족행위인가?’라는 기고문을 실으면서 한국이 떠들썩했던 적이 있다. 당시 제정된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이런 기고문을 쓴 직접적인 계기였다. 그래서 이영호 인하대 교수(사학과)는 이것을 ‘식민지 근대화론의 커밍아웃’이라고 하였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사회적 이슈가 될 때마다 여론의 뭇매를 맞았지만,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튀어나와 염장을 지르는 것 같다. <반일 종족주의> 책을 읽고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는 “보수 우파들 기본 생각과도 어긋나는 내용”이라고 하였고, 장제원 자유한국당 의원은 “책을 읽는 동안 심한 두통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 정도로 이 책은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대다수의 한국 국민들의 보편적 상식과는 동떨어져 있다.

일제강점기의 자료들을 들여다보며 조선이 개발되었다는 것으로부터 그것이 조선인에게도 이득이 되었을 것이라는 논리 전개 속에는 논리의 비약이라는 함정이 있다. 조선이라는 지역의 개발과 조선인의 개발을 구별하지 못하는 비약이다.

일본인들은 맹렬한 속도로 조선의 토지를 장악해 갔고, 광공업 자산은 90% 이상이 일본인들 소유였다. 소수의 일본인들이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을 집중적으로 소유했기 때문에, 소득분배가 민족별로 불평등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민족별 불평등의 확대재생산 과정이 식민지시대 조선에서 벌어지고 있던 개발의 본모습이었다.

불평등한 개발은 민족 차별을 확대시켰다. 조선의 개발은 일본의, 일본인들에 의한, 일본인들을 위한 개발이었기 때문에 원래 이 땅의 주인이었던 조선인들은 그러한 개발의 국외자에 불과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점점 더 민족별 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경제적 불평등이 확대되는 이른바 ‘식민지적 경제구조’에 갇히게 되었다.

어떤 한 나라의 생활조건을 물질적인 소비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들의 삶의 질이 좋아졌다든가,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는 등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식민지 근대화론의 ‘불편한 진실’은 ‘불편한 허구’에 불과하다.

<반일 종족주의>의 공동 저자로 이름이 알려진 낙성대경제연구소 '이우연(李宇衍)' 연구위원은 지난 2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41차 '유엔 인권이사회' 비정부기구 일반토론에서 '국제경력지원협회(ICSA)' 소속 연사로 발표했다.

그는 ‘강제동원은 없었다’는 취지의 발표를 90여 초간 이어가며 일제강점기 ▲ 조선인 노동자들이 강제로 납치되어 노예처럼 일했다는 믿음은 잘못된 것이며 ▲ 많은 조선인들이 자발적으로 일본에 노동을 하러 갔고 ▲ 임금의 수준도 공평하고 또 매우 높았으며 자유롭고 쉬운 삶을 살았다는 주장을 전개했다.

26일 YTN은 <반일 종족주의' 학자의 민낯..."日 극우 지원받았다">는 제목의 단독보도를 게재, 이 연구위원에게 UN 발표를 제안하고 비용을 댄 것이 일본 극우단체라는 사실을 지적했다. 이어 이러한 역할을 한 인물로 국제경력지원협회(ICSA)에 소속된 후지키 순이치(藤木俊一)를 짚었다.

이 연구위원에게 여비를 지급했다는 일본역사논전연구소의 정식 명칭은 '국제역사논전연구소(國際歷史論戰硏究所)'다. 지난 2018년 11월 일본 내 수구 성향의 학자들이 설립한 극우 역사단체로 회장을 맡고 있는 스기하라 세이지로 교수는 일제가 일으킨 전쟁, 전시활동 등을 지지하고 위안부, 난징대학살 등의 만행을 축소·부정하는 단체인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7대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이우연 연구위원이 가입돼있다고 밝힌 국제경력지원협회는 2002년 가네코 마사노리라는 인물에 의해 '특정 비영리활동법인'으로 설립됐다. 이후 2015년 '일반 사단법인'으로 변경, 현재에 이르고 있다. 국제경력지원협회는 극우단체가 맞다. 구체적으로는 극우 인사들의 유엔 진출을 보장하는 '창구', 혹은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유엔에 등록되는 NGO에는, 3단계의 자격이 있고 우리 NGO의 자격은, '국제경력지원협회'가 특수자문 자격(Special Consultative Status)으로 유엔의 공간을 빌릴 수 있는 것(발언할 수 있는 것), '나데시코 액션'은 현재 로스타 자격이다.

국제논전연구소 또한 국제경력지원협회의 이름을 빌려 유엔 활동을 하고 있는데 홈페이지에 따르면, 이들은 지난 3월 11일 유엔 인권이사회 비정부기구(ong) 발언에서 위안부를 "전시 매춘부(wartime prostitutes)"라고 언급하고, 한국 사법부의 강제징용노동자 배상 판결을 비판하며 "당시 징용노동자들이 높은 연봉을 요구하고 스스로의 의사로 일하고 있었다"라는 주장을 전개했다.

안타까운 것은 현재로선 국제경력지원협회를 통한 우익들의 유엔 진출을 막을 방도가 딱히 없다는 것이다. 국제경력지원협회는 실제로도 유엔에서 특수자문자격(Special Consultative Status)을 인정받은 일본의 NGO다.

‘뉴스타파’의 프로그램 말미에 항상 등장하는 고 리영희 선생님은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키려고 한 것은 국가가 아니라…진실”이라고 말한다. 소위 애국을 내세우는 것보다, 진실을 지키는 것이 결국 국가를 구성하는 구성원 모두에게 궁극적으로 이득이 될 것이라는 뜻이다.

‘반일 종족주의’를 다루는 언론 행태의 문제가 심각하다. 소위 실증주의, 즉 사료에 기반을 두고 내린 결론이라는 주장 아래 <반일 종족주의>의 저자들은  정치적 목적에 따라 일부만 남은 사료를 사용한 오류, 잔존하는 사료의 무리한 일반화, 사료의 잘못된 해석, 다른 사료의 이해 부족 등 연구 자체의 문제점이 지적된다.

‘반일 종족주의’ 프레임을 앞세워 역사를 왜곡하는 사람들에게 대응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은 무엇이 진실인지 밝히는 일이다. ‘학문’이라는 외피를 쓴 왜곡된 논리가 일부에서 반향을 일으키는데 학문적 논쟁 없이 친일·반일 구도만 강조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오해와 갈등만 증폭시킬 뿐이다.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징용을 옹호하는 책 ‘반일 종족주의’에 대해 역사학자 전우용씨가 “학설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평가 절하했다. 또 페이스 북에 “5ㆍ18 북한군 개입설을 신봉하는 자들이 ‘반일 종족주의’를 극찬한다. 지적 능력이 인간 이하인 자들에게 칭찬받는 걸, 저 책 저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전씨는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과 같은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대기업 위주의 정책을 편 과거 정부와 같다고 비판을 이어갔다. 그는 “이른바 ‘신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사람의 삶을 보지 못하고 돈의 흐름만 본다. ‘최저임금 인하하고 부자들에게 돈을 몰아줘야 경제가 성장한다. 그래야 가난한 사람들도 혜택을 본다’는 이명박ㆍ박근혜주의자들과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정치적으로 한편이 된 건 이 때문”이라면서 “그들은 노동자가 덜 먹고 더 많이 일하게 되는 걸 ‘근대화’라고 부른다”고 지적했다.

조정래 작가가 29일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자신의 소설 ‘아리랑’을 두고 “있을 수 없는 조작”이라고 주장한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에 대해 “무식하기 짝이 없고 현장취재를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관념에 사로잡힌 자의 친일파인 민족반역자가 하는 소리”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조 작가는 소설 ‘아리랑’의 경우,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한국사를 토대로 했고, 추가 취재가 필요한 대목인 경우 현장 조사, 취재를 했다고 밝혔다. 그는 “예를 들어 차갑수 총살 사건은 전북 순창에서 들은 이야기”라며 “다시 전주에 와서 만난 향토사학자도 똑 같은 증언을 해주셨다. 순사들이 칼을 차고 다니는 사진도 나와 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황당한 거짓말을 하냐”고 말했다.

이 전 교수는 아리랑 12권에 나오는 방공호 학살 장면에 대해서도 거짓, 조작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조 작가는 해당 부분에 대해 “홋카이도와 사할린에서 1992년, 1993년에 걸쳐서 취재를 했다”며 “지금도 사할린에 가면 탄광에서 일하신 분들이 살아계신다. 그 증언한 자들이 살아있는데도 이 따위 소리를 하냐”고 받아 쳤다.

‘반일 종족주의’가 베스트셀러가 된 것에 대해 조 작가는 “사람들은 그 사람 뜻에 호응한다고 생각하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하도 황당무계한 소리를 하니까 ‘도대체 무엇을 썼는가 봐야 되겠다’ 하고 하는 것이지 좋아서 베스트셀러가 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명백히 알아야 한다”고 꼬집었다.

어둡고 아프고 부끄러운 역사도 우리 역사다. 밝음과 어둠, 긍정과 부정을 함께 기록하고 기억할 때 바른 역사가 된다. 3·1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잊혀 진 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항일투쟁을 재조명하는 작업이 활발하다.

그러나 일제가 어떻게 노동자를 강제 징용하고 군위안부 제도를 운영했는지를 밝히는 작업은 상대적으로 소홀하다. 청일전쟁·러일전쟁뿐 아니라 을사늑약·강제합병 같은 망국 역사에 대한 연구도 미진하다. 망국의 책임이 을사오적이나 이완용 등 몇 사람에게만 있지 않은데도 말이다.

정부는 매년 11월 17일을 ‘순국선열의 날’로 기리고 있다. 1905년 을사늑약에 항의한 순국지사들을 생각하자는 뜻이지만, 기념일 명칭만으로는 망국의 단초를 연 사건의 메시지가 명확하지 않다. 어두운 역사를 회피하려는 무의식은 ‘국치일’에 대한 무관심에서 잘 드러난다. 국권 침탈일을 기념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억은 해야 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8월 29일과 11월 17일을 각각 국치기념일과 순국선열의 날로 지정했다. 임시정부가 망국의 역사를 기억하겠다는 것은 ‘쓰러진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순국선열의 날은 광복 후에도 이어져 1997년 법정기념일로 승격됐다. 그러나 국치일 행사는 임시정부에서 끝났다. 해방 이후 대한제국이 망한 8월 29일은 국민의 기억에서 지워지고 있다.

조선시대 사관들이 썼던 <승정원일기>나 <왕조실록>은 당대의 역사에 대한 기록이다. 백암 박은식이 망국의 전말을 기록한 <한국통사>와 독립투쟁을 담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 황현의<매천야록>은 모두 직접 보고 듣고 취재한 사건의 기록이다. 이처럼 당대를 기록하는 전통은 해방 이후 사라졌다.

일본 식민사관의 영향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사>(37권)는 개항에서 끝난다. 이후 ‘역사는 최소 50년 전의 기록이어야 한다’는 묵계가 생겨났다. 당대의 역사가 한국사에서 배제됐고, 현대사 교육은 금기시됐다.

일본의 수출규제, 미·중 무역마찰 등으로 한국을 둘러싼 경제, 외교안보, 군사 상황은 어느 때보다 엄중하다. 시대를 응시하고 기록하는 것은 역사가의 책무다. 현실을 외면한 채 상아탑에 갇혀 있으면 <반일 종족주의>와 같은 사이비 역사가 득세한다. 역사가가 미네르바의 올빼미처럼 황혼녘에 나선다면 때는 너무 늦다.

혐한 콘텐츠를 토대로 한 가짜 뉴스나 허위 정보가 끝없이 유통되기 때문에 혐한으로 잠식된 온라인 상황은 평소 한국에 호의적이거나 적어도 중립적이던 사람까지 한국에 대한 인식을 나쁘게 만들기 십상이다.

싱가포르의 랜드 마크인 마리나베이샌즈 호텔은 설계부터 건물이 최대 52도 기울어진 형태로 최첨단 경사구조 시공법이 적용됐다. 한국 건설사가 일본, 프랑스 등 해외 건설사를 제치고 수주를 따냈다.

그런데 일본 온라인에 비스듬한 마리나베이샌즈 호텔의 사진을 건물이 기우는 증거로 내세운 가짜 뉴스가 퍼져 있다. 일본 포털 사이트 야후 재팬엔 마리나베이샌즈 호텔이 공사 부실로 건물이 기울고 있다는 내용의 이상한 기사로, 한국 회사가 엉망으로 공사하는 바람에 붕괴하고 있다는 글들이 넘쳐났다. 한국 건설사들이 워낙 싼값에 수주하기 때문에 부실 공사가 많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극우 성향의 산케이신문은 온라인이 활성화되기 이전엔 발행부수가 얼마 안 되는 그저 그런 매체였지만 요미우리신문, 아사히신문, 니혼게이자이신문, 마이니치신문 등 메이저 신문들이 온라인 대응에 소극적이었던 것과 달리 산케이신문은 적극적인 온라인 대응책을 취했다. 메이저 신문들이 포털 사이트에 뉴스를 극히 일부만 제공하거나 온라인 유료 구독자만 자사 사이트에서 기사를 읽을 수 있도록 한 것과 달리 산케이신문은 기사를 모두 무료 제공한다.

온라인을 통해 쉽게 무료로 접할 수 있는 기사가 바로 혐한을 내세우는 산케이신문 기사인 셈이다. 게다가 혐한 콘텐츠로 수지맞는 장사를 한 산케이신문을 벤치마킹해 ‘다이아몬드’ ‘현대 비즈니스’ ‘JB프레스’ 등 극우 성향 온라인 미디어들까지 극성을 부리고 있다. 안타깝지만 일본의 젊은 층이 극우 성향을 띠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최근 일본 잡지 ‘뉴스포스트 세븐’은 ‘온라인의 한국 소재는 이제 오락인가, 혐한에서 치한(嗤韓·한국 조롱)으로’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7월 초 불화수소 등의 수출 규제 이후 온라인상에서 한국에 대한 뉴스와 콘텐츠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현상과 특징을 분석했다. 기사에 따르면 과거에는 네티즌들의 반응이 ‘혐한’이었다면 이제는 한국을 무조건 비웃는 ‘치한’ 상태가 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찌 됐든 온라인상에서 혐한 뉴스를 앞세워 클릭수를 대폭 늘린 웹 미디어가 승자라고 지적했다. 그런데 이 승자에는 국내 몇몇 보수 성향 신문의 일본어판도 포함됐다.

일본이 당분간 한국에 대한 추가 경제보복 등으로 확전에 나서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도 관광객 감소와 수출 부진 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NHK는 한국에 전기기기 등을 수출해온 야시마산업의 사례를 전하면서, 수출규제 품목이 아닌데도 지난달 판매액이 약 40% 감소했다고 보도했다.

<아사히신문>은 이날 “한 번에 해결되지 않아도 좋다. 일-한 정상이 지금이야말로 과열된 여론에 휩쓸리지 말고 중장기 국익을 보고 대화를 피하지 말고 회담을 해야 한다”며 정상회담을 통한 해결책 모색을 강조했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파기, 화이트리스트 배제 적용 등으로 한일 갈등이 심화되고 일본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이 거세다. 불량 부정제품에 대한 소비자 불매운동과는 다른 차원이다. 이달 중순에 실시한 한 여론조사에서 일본제품 불매운동에 참여하고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79.2%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불매운동의 상징처럼 된 유니클로의 매출이 이전에 비해 절반 이하로 줄었다고 한다. 해외시장에서 제조해 여기에 납품하는 한국의 의류공장들은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이다. 매장 점원들은 실직을 걱정해야 할 처지다.

한국인 관광객이 많은 도쿄 오사카 오키나와 후쿠오카 등 4개 지역의 7월 카드 매출액이 6월에 비해 20% 정도 감소했다. 단체관광 예약 취소가 줄을 잇는 것으로 봐서 8월 매출은 이보다 더 많이 줄 것이다. 수입맥주 가운데 부동의 1위였던 아사히가 칭타오, 하이네켄 등에 밀려났다.

일본 국토교통성에 따르면 5월 규슈를 찾은 외국인 관광객 37만 명 중 한국인은 49.5%인 18만 3000명으로 중국인 관광객(8만 2000명)의 두 배 이상이었다. 한국인 관광객은 이 지역의 경제를 떠받치는 버팀목이었던 셈이다.

지난해 한국인 관광객이 일본에서 쓴 돈은 5881억 엔(약 6조 7000억 원)으로 전체 외국인 관광객이 지출한 4조 5189억 엔의 13%에 달한다. 중국인 관광객(1조 5450억 엔)에 이어 2위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한국인의 일본 여행 취소가 내년까지 이어져 최근 20년 가운데 최소 수준(1998년 9억 7000만 달러)으로 감소하면 일본의 경제성장률이 0.1%포인트 가량 내려갈 수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인 관광객이 계속 줄면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도 부담을 안 느낄 수 없다. 아베 총리는 2012년 말 재집권한 후 자신이 직접 의장을 맡은 ‘관광입국(立國) 추진 각료회의’를 신설해 강력한 관광산업 정책을 폈다. 도쿄 올림픽이 열리는 2020년에 외국인 관광객 4000만 명이 일본을 찾아 8조 엔을 쓰고 가게 만들겠다는 목표도 세웠다. 하지만 한국인 여행객 감소는 이런 목표 달성에 빨간불을 켠 것이기도 하다.

한국은 한때 자동차 생산 세계 5위까지 올랐으나 작년에 멕시코에도 밀리면서 7위로 떨어졌다. 인공지능과 함께 자율 주행차 수소 전기 차의 출현으로 자동차산업의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미래 차 시장을 둘러싼 격변이 벌어지고 있다. 현대자동차 노사가 27일 올해 임금 및 단체협상을 잠정 타결했다. 파업 없이 무분규로 임단협에 합의한 것은 8년 만이다.

파업은 노동자의 권리지만 매번 강경대치와 파업으로 생산 차질을 빚는 것은 노사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은 소모적인 연례행사였다. 회사 측은 작년 경영실적이 나빴음에도 거액의 성과급을 주면서 양보했고 노조도 정년퇴직자 자녀 우선채용 같은 불합리한 조항을 없애 성숙한 모습을 보였다. 미중 무역분쟁과 일본의 수출 규제라는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맺은 합의안을 9월 2일 조합원 투표에서 무산시키는 일은 없어야 한다.

한일 갈등이 불거진 뒤 열린 방탄소년단의 일본 오사카 시즈오카 순회공연은 공연마다 수만 명의 일본 팬이 몰려 난리가 났고, 음반 판매도 1위를 달렸다. 하지만 앞으로 사태 추이에 따라 어떻게 될지 모른다. 과거 일왕 사죄 요구 등 몇 차례 갈등이 불거졌을 때 단체관광이 일제히 취소됐고 한류 바람이 급속히 식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고용노동부는 다음 달 코엑스에서 열 예정이던 해외취업박람회를 취소하기로 결정했다. 불매운동이 일고 있는 와중에 일본 기업이 대거 참여하는 행사를 진행하기가 부담스럽다는 이유다. 일본 취업의 꿈에 부풀어 있던 청년들이 유탄을 맞은 셈이다.

한국은 이미 경제 규모 세계 11위, 1인당 소득 3만 달러로 선진국 문턱에 와 있다. 해외 원조 받던 세계 최빈국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는 미국은 물론 일본과의 기술 협력, 상품 교역이 큰 역할을 했다. 지금은 일제하 물산장려운동, 인도의 스와데시(영국 상품 불매운동)를 벌이던 식민지 시대가 더 이상 아니다.

가슴이 뜨거운 것은 좋으나 머리까지 뜨거워지면 안 된다. 일본 관광객이 많이 찾는 명동 한복판에 ‘노 저팬’ 현수막을 내건 구청장과 그 현수막을 끌어내린 지역 상인들이 그 사실을 웅변한다.

일본의 부당한 경제보복 행태에는 단호한 대응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 필요하지만, 기업 간 협력과 같은 민간 외교 무대에서는 합리적이며 실리적인 태도가 우선이다.      

-사회적협동조합연합회중앙회 한상석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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