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마지막 날
10월의 마지막 날
  • 한상석 칼럼니스트
  • 승인 2019.11.01 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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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관계는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관계다. 역사적 앙금이 남아 있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회피할 수가 없다. 

2018년 10월 30일, “일본정부는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강제동원 피해의 법적배상을 원천적으로 부인하였고, 강제동원 위자료 청구권이 청구권협정 적용대상에 포함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라는 우리 대법원판결이 나왔다.

1년이 지난 지금 일본은 판결이행을 거부하고 있다. 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 등 180여명은 여전히 소송을 이어가고 있지만, 사과와 배상을 받은 피해자는 단 한명도 없다. 

북핵 공조, 위안부, 역사교과서, 강제징용 등 모든 문제는 얼굴을 맞대고 진지하게 논의하면서 차근차근 풀어나가야 한다. 문제해결의 원칙으론 국제법, 선린관계, 상호존중, 공통이익 증진 등을 들 수 있다. 

1998년 맺어진 ‘한·일 파트너 십 공동선언’의 정신과 해법으로 ‘실사구시(實事求是)’적으로 접근해 돌아가야 한다. 당시 오부치 게이조 총리는 과거사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사죄’를 언급했고, 김대중 대통령은 ‘미래 지향적 관계 발전을 위한 노력’으로 화답했다. 

일본정부는 1965년 한일협정으로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됐다며, 도리어 한국을 상대로 경제보복을 강행한 이후, 한·일 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과거사를 정리하지 못한 한·일관계의 취약성을 고스란히 드러낸 1년이었다.

10월 25일 KBS 시사프로그램 ‘시사직격’에서 극우성향 일본언론사인 산케이신문의 구보타 루리코 해설위원이 “한·일관계가 어려움에 봉착한 원인은 문재인씨의 역사관 때문”이라며, “문 정권은 친일의 뿌리를 가진 박근혜가 해온 일을 외교적 실패로 규정하고 그걸 무너뜨리고 바로잡으려고 한다. 그런 신념이 있는 한 한·일 대화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10월 29일 역사학자 전우용씨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그 산케이 기자는 한국에서 ‘씨’가 어떻게 사용되는지 모를 리 없다”며, “만약 KBS 일본특파원이 NHK에 출연해 ‘나루히토씨’라고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라고 말했다. 

구보타 해설위원이 의도적으로 문 대통령에게 ‘~씨’라는 호칭을 쓴 것이며, 이는 한국인 기자가 일본 공영방송에서 나루히토 일왕을 ‘나루히토씨’라고 부른 것이나 마찬가지로 무례한 행동이라는 지적이다.

그는 “한국문화를 잘 아는 일본인의 의도적 무례를 덮어주려고 애쓰는 것도, 우리 안에 남아 있는 ‘혐한 의식’”이라고 꼬집으면서, “일본정부가 한국정부에 무례한 이유도, 일본 편에서 생각하는 한국인이 많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일본 편향적 방송이라는 비판이 일자, 지난 10월 28일 시사직격 제작진은 “일본에서는 ‘~씨’라는 표현이 격식을 갖춘 존칭어로 사용되고 있다”며, “아베 총리를 지칭할 때도 출연자 모두 ‘~씨’라는 표현을 총리라는 단어와 함께 사용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온라인에서는 여전히 ‘시사직격’에 따가운 눈총이 이어지고 있다. 방송 직후부터 10월 29일까지 시사직격 홈페이지 시청자소감 게시판에는 500여개가 넘는 비판 글이 쏟아졌다. 

일본정부는 지난 7월 4일 고순도 불화수소·플루오린 폴리이미드·포토레지스트 등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소재 3개 품목의 한국 수출규제를 강화했다. 이어 8월 28일에는 한국을 수출우대국인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했다.

지난 7월 대한국 수출규제를 시작한 뒤, 한국인 관광객 격감과 대한국 수출 감소,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지소미아) 종료 등에 따른 영향이 전 방위로 파급되고 있다. 일본정부도 한-일 관계의 추가악화는 바라지 않는 듯하다. 

일본이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 조치를 적용한 지 수개월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우리 경제에 미치는 피해는 제한적이라는 분석이다. 도리어 일본의 보복조치로 한국의 불매운동 등이 촉발되며, 일본의 대한(對韓) 수출업종이 큰 타격을 입은 것으로 나타났다.

 

1. 불매운동

일본 NHK에 따르면, 10월 30일 일본정부 대변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정례회견에서 지난달 일본산 맥주의 한국수출이 대폭 줄어든 것과 관련해 "한국에서 일본기업에 경제적인 악영향을 주려는 불매운동이 벌어지는 것은 유감"이라고 밝혔다.

이어 "한·일 양국정부의 관계가 어려운 상황이어도 국민 간의 교류와 경제 활동은 활발히 이루어져야 한다"라며, "한국 측의 향후 동향을 주시하겠다"라고 강조했다.

이날 일본재무성은 9월 일본산 맥주의 한국수출이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98.8% 감소했고, 일반음료의 한국수출은 사실상 '제로' 수준이라고 밝혔다.

NHK는 "일본정부가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를 강화한 지난 7월부터 한국 시민단체들이 일본제품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다"라며, "당시 여론조사에서 70%에 가까운 시민들이 불매운동에 찬성하면서 일본기업의 한국수출이 크게 감소했다"라고 전했다.

그러나 스가 장관은 한·일 갈등의 배경이 된 일제 강제징용피해배상 판결에 대해 "한국정부가 판결 후 1년이 지나도록 국제법 위반을 시정하지 않은 것은 매우 유감"이라며, "일본은 일관된 입장에 따라 한국 측에 현명한 대응을 촉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10월 30일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일본 수출규제 100일의 경과, 영향 및 향후 대응’ 보고서를 통해,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가 한국경제에 상당한 타격을 가할 것이라는 우려가 컸지만, 첫 조치 후 100일이 지난 현재까지도 영향은 제한적이라고 평가했다. 

KIEP는 개별허가 소재 중 한국기업들이 실질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 고순도 불화수소가 국내기업이 확보한 재고, 국산화를 포함한 공급처 다변화 등으로 아직까지 큰 영향이 없다고 봤다. 

이날 교도통신 보도에 따르면, 반도체 세정과정에 사용하는 불화수소의 지난 9월 한국 수출액은 372만 3000엔(약 4000만원)으로, 전년 동월 대비 99.4% 줄었다.

또한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는 일본기업이 생산하는 것은 소재자체가 아니라 소재의 재료물질이고, 포토레지스트는 일본기업의 해외공장, 대만 등에서 조달할 수 있어 이들 핵심소재 품목의 수출규제가 한국 반도체산업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고 분석했다.

보고서는 이 때문에 현재까지 국내기업의 생산이나 주가에 미치는 영향도 제한적이고, 일본계 자금이 유입된 국내기업들의 재무구조가 나아진 상태여서 일본계 자금유출에 따른 파급효과 가능성도 작다고 판단했다.

KIEP는 오히려 불매운동 등으로 일본 측의 타격이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의류·맥주·자동차 등 업종에서 일본기업의 한국 내 매출이 급감하고 있고, 일부업체는 한국 내 사업을 철수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또 일본을 여행한 한국인이 지난 8월 48%(작년 동월 대비) 급감하자 오키나와(沖繩) 등 일본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여행사에 긴급자금을 지원하는 등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일본의 대한 수출규제 조치가 장기화하면 한국의 피해도 가시화할 수 있다. KIEP는 일본의 대한 수출규제로 한국의 반도체생산이 10% 감소하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은 약 0.320∼0.384% 줄어들고, 수출도 약 0.347∼0.579%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다. 

또한 화학·전자·기계 산업에서 일본의 대한 수출이 5% 감소하면 한국의 GDP는 0.015∼0.020%, 수출은 0.026∼0.036% 각각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다.

한국정부가 일본의 조치를 문제 삼으며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했지만, 최종 결론이 내려질 때까지는 약 3년이 걸릴 것으로 KIEP는 보고 있다. 보고서는 “한·일 갈등이 장기화하면 동아시아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갈등을 해소할 출구전략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며, “정부는 일본의 수출규제 조

치 장기화에 대비해 국내 소재·부품·장비 산업의 국산화와 공급망 안정화를 통한 체질개선 강화를 도모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일본재무성이 이날 발표한 9월 무역통계 확정치를 보면, 일본이 한국에 수출한 맥주 금액이 지난해 9월 7억 8485만 엔에서 99.9% 격감한 58만 엔을 기록했다. 일본정부가 강제동원과 관련해 자체구상을 검토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온다.

그런데 <요미우리신문>은 일본정부가 한국정부 대응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 다음 달 중에는 ‘한-일 정상회담을 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굳혔다고 전했다. 다음 달에는 타이 방콕에서 동남아시아연합 관련 정상회의와 칠레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예정돼 있다.

지난 10월 15일 유니클로는 98세 패션 컬렉터 '아이리스 아펠(Iris Apfel)'과 13세 패션 디자이너 '케리스 로저스(Kheris Rogers)'가 모델로 등장하는 광고를 선보였다.

광고영상에는 10대 소녀가 “제 나이 때는 어떻게 입었냐”고 묻자, 90대 할머니는 “그렇게 오래 전 일은 기억하지 못 한다(I can’t remember that far back)”고 답하는 내용이 영어로 담겼다. 

그러나 우리말 자막에선 할머니의 대답이 “80년도 더 된 일을 기억하냐고”로 의역되면서, 80년 전 일제강점기를 언급하며 위안부문제를 조롱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불러 일으켰다. 

실제로 '80년 전'인 1939년은 일제가 '국가총동원법'을 근거로 우리 국민들을 수탈했던 시기다. 특히 1937년 중·일 전쟁 이후 일제는 우리 땅의 소녀들이 전쟁터 성노예로 끌려가 평생을 잊을 수 없는 고초를 겪게 했다. 당시 학생 및 청년들도 동아시아 전역에 학도병 및 강제노역 대상자로 끌려가 침략전쟁의 희생양이 됐다.
   
10월 21일 오후 서울 광화문 유니클로 매장 앞에는 대학생겨레하나, 평화나비네트워크 회원들이 "80년 전 식민지배 우리가 기억한다" 등의 피켓을 들고, 벌인 기자회견에서 

"불법적 식민지배 아래 있던 우리 국민들이 강제동원이 시작된 것이 80년 전"이라면서, "유니클로는 앞장서서 2017년 전범기인 욱일기가 들어간 티셔츠를 팔았고, 유니클로 간부는 독도를 다케시마로 바꾸는 운동에 돈을 내고 있다. 유니클로 광고는 피해자들 가슴에 난 상처에 소금을 바른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유니클로의 광고는 유니클로와 일본정부가 피해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한 것이다. ‘불매운동’이 꺾였다 말하는데, 전혀 아니다. 불매운동은 우리들의 양심을 보여주는 최소한의 표현에 불과하다.

10월 21일 호사카 유지(63) 세종대 정치학 교수는 광고에 등장하는 '98세 할머니'를 언급하며, "지난해 강제징용자 판결에서 한국이 이겼는데, 한 사람 살아남은 이춘식 할아버지는 98세였다"고 설명했다. 나주 출신 이춘식 할아버지는 지난해 승소한 강제징용 재판의 유일한 생존자다.
 
호사카 교수는 또 광고에 나오는 13살 디자이너를 언급하며, "현재까지 확인이 된 가장 어린 위안부피해자의 나이는 13살"이라며, "광고에 '잊어버렸다'라는 말까지 붙여서 (위안부와 강제징용자 등의) 고통을 사실상 잊었다는 내용으로 조롱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는 그런 광고"라고 강조했다.

유니클로는 ‘일본 제품 불매운동’에서 상징적인 존재였으나, 최근 진행한 대규모 할인행사에 소비자들이 몰리며 불매운동이 주춤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그러나 광고논란 후 불매운동은 다시 확산되는 양상이다. 일각에서는 광고에 등장한 후리스 대체품을 찾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합성섬유인 폴리에스테르를 가공해 양털 같은 느낌을 내는 보온 원단인 플리스는 1990년대 유니클로에서 관련제품을 선보이면서, 일본식 발음인 ‘후리스’로 널리 알려졌다. 누리꾼들은 국내 의류브랜드인 ‘탑텐’ 등의 플리스 정보를 공유하며, 불매를 독려하고 있다.

 

2. 징용배상 판결 1년

한국대법원이 일본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에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라고 판결한 지 10월 30일로 1주년을 맞았다. 당시 대법원은 징용피해자 4명이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에서, 11 대 2로 “피해자들에게 각각 1억 원을 배상하라”는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당시 일본제철의 행위는 불법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과 직결된 반인도적인 불법행위이고, 피해자들이 명백히 정신적 고통을 입었다고 판시했다.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피해자들의 배상청구권이 소멸한 것은 아니라’는 뜻도 밝혔다. 

일제의 식민지배와 신일본제철의 반인도적 행위로 피해자들이 받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피해자들은 60년 넘게 기다린 끝에 2005년 한국법원에 첫 소송을 제기했고, 13년여 만에 확정판결을 받았다. 그사이 원고 4명 중 이춘식씨 혼자 생존해 있다. 

지난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소영)의 강제징용에 대한 배상을 명령을 두고, 일본은 비상식적인 판결이라도 나온 듯이 반응을 보이고 있다. 2012년 5월 24일에 나온 대법원 민사2부(주심 김능환)의 강제징용 배상판결에 대해서도 같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

2012년 대법원판결은 강제징용피해자들의 배상청구권을 부인한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환송하는 내용이었다. 이 환송판결에 따라 서울고법이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주자, 전범기업이 대법원에 재상고한 결과로 2018년 판결이 나오게 됐다. 

두 개의 대법원판결 사이에 6년이란 긴 시간이 소요됐던 이유는 ‘박근혜와 양승태’ 라는 두 이름에서 찾을 수 있다.

1년이 되도록 법적으로 인정받은 권리를 실현하지 못한 것은 너무나 부당하다. 게다가 신일철주금 등 일본기업의 국내 자산에 대한 압류절차가 중단된 상태이다. 자산 매각을 위해서는 일본기업에 압류명령서를 보내야 하는데, 일본 외무성이 특별한 사유를 밝히지 않은 채 이를 반송했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에 대한 2차 가해행위나 다름없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일본정부의 비상식적인 입장 탓이다. 일본정부는 개인의 손해배상청구권을 국가 간 협정으로 소멸시킬 수 없다는 국제인권법의 기본을 무시하고 있다. 

징용피해자들의 배상금 현금화 조치가 연말이나 내년 초에 마무리될 수 있다. 일본기업의 자산 강제매각이 현실화하면 한·일 갈등은 한층 더 격화된다. 그런 상황에 이르기 전에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 판결은 역대 최악이라는 ‘한·일 관계의 현재를 촉발한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관계회복을 위해선 꼭 해결해야 할 ‘최대쟁점’으로 부각했다. 

대법원이 일제의 강제징용 배상판결을 내린 후 지난 1년 동안 한·일 관계는 갈등 확산의 양상을 보여, 과거사가 ‘수출규제’라는 경제문제로 바뀌었고, 다시 GSOMIA 종료란 안보문제로 비화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한국 대법원판결이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라는 입장을 견지하며, 경제보복을 강행해 관계가 악화일로로 들어서는 시발점이 됐다. 이 여파로 상호 혐오감정과 함께 민간교류까지 크게 위축되는 지경에 이르자 ‘이대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양국에서 일었다. 

지난 10월 24일 일왕 즉위식을 계기로 평행선을 달리던 양국관계가 이낙연 국무총리와 아베 신조 총리 회담으로 분위기가 달라졌다. 

이 총리는 아베 총리를 만난 자리에서 “양국 현안이 조기에 해결되도록 서로 관심을 갖고 노력하자”는 취지의 문재인 대통령 친서를 전달했고, 아베 총리는 “양국 관계가 아주 어려운 상황이지만 이대로 방치해선 안 된다. 대화를 지속하고 여러 분야의 소통이 필요하다”고 발언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일 정상 간에 사태악화 방지 및 관계복원의 의지가 읽힌다.

총리회담은 겉으로는 기존 입장을 확인하는 모양새를 띠었으나, 해결 노력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지체되긴 했지만, 이러저러한 해법과 정상회담 가능성이 거론되는 등 긍정적인 분위기여서 그나마 다행이다.

한·일 갈등의 최대 쟁점은 ‘청구권협정에서 한국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까지 모두 소멸했느냐’이다. 

아베 정부는 당시 ‘명확히 소멸했다’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당시 양국정부의 시급한 필요성에 의해 졸속으로 처리되며, 각기 다른 해석의 여지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일본 조야에서조차 ‘소멸하지 않았다’는 해석이 수차례 있었다. 

1991년 야나이 슌지 일본 외무성 조약국장이 참의원에서 "외교 보호권을 포기했다는 것이지, 개인 청구권 그 자체를 국내법적인 의미로 소멸시킨 것은 아니다"라고 발언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우경화의 길을 걷는 아베 정부의 입장은 한 치의 물러섬이 없이 요지부동이라서 유감이다. 이 사안을 깔끔하게 합의 규정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양국의 해석 차이는 차이대로 두고 상호 명분은 살리면서, '윈윈'할 수 있는 해법을 찾는 길이 더 현실적일 것이다. 

우리정부가 지난 6월 이른바 '1+1'(한일기업의 자발적 참여로 위자료지급) 안을 제안하는 등 여러 해법이 거론돼 온 것도, 이런 한계를 우회하면서 접점을 찾으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양쪽 입장을 절충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려면 일본정부가 한국이 먼저 입장을 달리해야 한다는 태도부터 바꾸어야 한다. 12월에는 한·중·일 정상회의가 예정돼 있다. 양국은 갈등해결의 접점을 찾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그간 여러 해결책이 제시됐지만, 아직 묘안은 안 보인다. 그중 "일본의 사과를 전제로 한국 측이 위자료를 지급한다"는 방안은, ‘피해자의 법적권리 확보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제외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이 일단 위자료를 지급한 뒤 일본기업에 구상권을 청구한다"는 방식도, 법적으로 가능할지 의문이고, 일본기업의 책임성도 담보되지 않을 한계가 있다. 

"일본기업이 확정판결을 받은 이들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면 한국 측이 이를 보전해주고, 아직 재판 중이거나 소송을 제기하지 않은 피해자에 대해선 한국 측이 책임진다"는 타협안도 있지만, ‘일본기업이 위자료를 먼저 지급할지 불투명’하고, 한국정부가 이를 보전해준다면 ‘판결 취지에 어긋나는 문제’가 있다. 

한국정부와 기업이 경제협력 명목의 기금을 창설하고, 일본기업이 참가하는 방안을 일본정부가 한국 측에 거론했다는 일본 언론보도도 나왔다. 한·일 정부는 이를 부인했으나, ‘한국이 먼저 입장을 바꿔야 한다’고만 요구해 온 일본정부가 적극적으로 타협을 모색하는 쪽으로 기류 변화가 있다면 바람직하다. 

현재로선 기왕의 아이디어를 종합하고 새 아이디어를 추가하며, 절충의 완성도를 높여가는 노력이 중요해 보인다. 더 나아가 연말까지 이어지는 다자외교 무대에서 한·일 정상이 마주 앉는다면, 최상의 시나리오가 될 것이다. 한·일 당국의 치열한 타결 노력을 기대한다.

아베 총리 면전에서 이 총리가 한 발언처럼 과거사를 기본조약과 청구권협정 틀 안에서 풀어나가되, 여타 문제(경제협력이나 안보사안 등)와 연계하지 말아야 한다. 예전에도 과거사 논란은 있었으나, 전 방위적인 교류 위축으로 연결되진 않았다.

 

3.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은 한국대법원의 판결에 대한 보복 조치로 일본이 취한 수출 규제(화이트리스트 삭제를 통한 우대조치 배제) 철회를 유도할 수 있는 기제가 될 것이다. 일본의 수출규제 철회가 가시화하면, 한국도 상응 조치를 중단함으로써 경제협력이 정상화될 것이다.

우리정부는 향후 과거사 해결에 있어 ‘진정성 있는 사과’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올바른 역사정리 및 역사인식 공유의 차원으로 옮아가야 한다. 도덕적 우위에 입각한 진정한 극일(克日)의 길이다.

문제의 근원을 파고 들어가면 할 말이 많은 쪽은 한국이다. 그럼에도 외교적 해결을 꾀하려는 것 아닌가. 일본이 한·일 관계를 대화로 풀겠다는 의지가 없다면, 백번을 만나봐야 헛일이다. 

일본은 이번에 열린 대화의 창을 닫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자면 아베 총리가 이 총리와의 면담에서 한·일 관계 개선의지를 보였는데, 향후 구체적으로 보이는 것이 우선이다.

10월 26일 데이비드 스틸웰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는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GSOMIA는 미국과 일본에, 그리고 한국에도 유익하다”며, 한국 정부를 상대로 GSOMIA 종료 결정을 재고해 달라고 요청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스틸웰 차관보는 또 “미국이 (한·일 갈등을) 중재할 입장이 아니다”라면서, “경제문제가 안보문제로 파급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전날 랜들 슈라이버 미 국방부 인도·태평양 안보담당 차관보도 “한국이 GSOMIA를 연장하지 않기로 한 결정을 재고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다음달 23일 효력이 종료되는 GSOMIA를 유지하라고 미 국무부와 국방부가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상황이다. 

스틸웰 차관보의 발언을 보면 미국의 GSOMIA 복원의지는 상당히 굳다. 그는 “GSOMIA가 종료돼도 한·미·일 방위기밀정보공유 각서(TISA)를 통해 군사정보를 계속 공유할 수 있다”는 한국정부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정보공유가 신속하게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은 한국이 일본의 화이트국가 제외조치에 대항해 GSOMIA 종료를 발표한 8월 22일 직후부터 줄곧, “미국의 안보이익을 고려해 좌시할 수 없다”는 식의 주권국가에 있을 수 없는 압박을 해 왔다. 

게다가 미국정부의 외교안보 고위간부가 하루 간격으로 GSOMIA 종료를 재고하라고 촉구한 것은 이례적이다. 그것도 볼일을 보러 간 일본에서 번복요구를 한 것은 일본을 의식한 편향된 발언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하지만 GSOMIA 종료는 당초 일본이 수출규제에 나서자, 한국 측이 어쩔 수 없이 택한 대응책이다. 그런데도 미국이 일본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한국을 향해서만 GSOMIA 종료를 철회하라는 것은 부당하다. 미 측은 경제문제가 안보문제로 비화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지만, 한국의 안보규정을 문제 삼아 경제보복을 가한 것은 바로 일본이다. 

GSOMIA가 한·일, 한·미·일 3각 협력의 토대를 이루는 협정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이 왜 종료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처음부터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한·일 신뢰를 기초로 군사정보를 교환하는 게 GSOMIA인데, 일본의 화이트국가 제외조치로 신뢰관계가 훼손된 상황에서 한국이 GSOMIA를 유지할 이유는 없었다. 

일본이 경제보복을 철회한다면 모를까, GSOMIA 재개는 어렵다. 일본이 수출규제를 철회하지 않는 한 한국 정부는 GSOMIA를 존속하기 어렵다. 아무리 미국이 원한다고 해도 이는 주권국으로서의 자존심이 달린 문제다. 

미국은 안보 문제에 경제문제를 끌어들이지 말라고 하는데, 경제문제에 안보를 끌어들인 것은 일본이 먼저다. 한·일 중재를 해 달라고 미국에 바라지도 않지만, 일본을 편드는 듯한 미국의 태도는 한국인의 공분을 살 뿐임을 알아야 한다.

한국인들은 GSOMIA 종료와 방위비 분담금 증액 요구가 한·미동맹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이를 무시하고 미국이 압박을 계속한다면 이는 한·미동맹을 약화시키는 일임을 미국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한편 프레시안에 실린 다른백년 이래경 이사장의 “지소미아 재개? 결코 일어나선 안 되는 이유”를 소개한다.

미국은 한반도와 관련하여 미·일 동맹과 한·미 상호군사조약에 더하여 한·일 간 군사협약을 추진하여, 미·일 동맹에 한국을 여전히 하위 파트너로서 편입시켜, 한·미·일 간의 군사삼각편대의 구성을 목표로 삼고,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4단계의 접근을 설정했다. 

1) 한·일 간 역사적 갈등의 해소 2) 한·일 간 군사정보의 공유 3) 일본중심의 군수지원 체계 확보 4) 한·미·일 군사연합작전실시 등 구상하면서, 첫 단계로 역사적 갈등의 핵심사안인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한·일 양국에 강하게 압박하였다. 

이런 배경에서 정신 나간 정권인 박근혜 시절 "확정적이고 불가역적인 합의"라는 이름으로, 고급빌라 한 채 값에 지나지 않는 10억 엔의 지원금을 제공받아 재단을 설립하는 것으로 종결하고, 곧바로 한·일 간 군사정보보호협정에 대한 합의 즉 GSOMIA를 체결하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범했다. 

GSOMIA는 단순히 한·일 간 군사정보교환을 넘어서 미국의 미사일방어체계(MD)에 편입되는 것으로 대상은 북한을 넘어, 미국의 적성국으로 분류된 중국과 러시아를 목표로 삼게 되는 것이다.  

한국이 미국의 하수인으로 중국에 군사적으로 맞대응하게 되면, 이미 ‘사드보복’이라는 사태를 통해서 경험한 바 있듯이, 대중수출과 관광산업을 중심으로 막대한 피해가 예상되며, 이런 배경으로 약삭빠른 이명박 '상인 정권'조차도 끝까지 위안부 합의와 GSOMIA 체결을 온갖 핑계로 미루고 지연시켜 왔던 것이다.  

아베 정권의 의도는 미국의 유엔사의 재 강화(다국적 지휘부)전략과 연계하여 한국을 미·일 동맹에 영원히 하수인으로 묶어두려는 꼼수인 것이다. 특히 ICT 분야 등 미래 산업 분야에서 일본을 추월하고 있는 한국을 압박하고자 무역 분쟁을 야기하여 한국을 제압하고, 미국에게 군사동맹의 관점에 기반 하여 ‘일본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라’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천우신조의 한·일 무역 분쟁을 계기로 잘못 체결된 GSOMIA의 종결을 결정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조치이며, 이를 계기로 미·일 동맹의 하위체계로 편입되는 군사적 관계를 탈피하여 군사외교 전략을 민족 통사적 관점에서 재구성해야 하며, 60년대 이후 산업 기술적으로 종속되어온 일본과의 무역통상적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이 마땅하다. 

일제하 강제동원 피해자는 총 780만 명으로 추산하는데, 이 중 이론상 소송이 가능한 사람은 2~3만 명 수준이다. 2~3만 명이 다 소송하는 게 불가능하고, 고령의 피해자들이 소송을 감당할 형편도 되지 않는다. 결국 정부가 국내와 국외 구분 없이 강제동원 피해자들 실태조사에 나서고, 이들을 지원할 방침을 마련해야 한다.  

10월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대회의실에서 '10·30 일제 강제동원 배상판결 1년, 강제동원 피해자의 인권피해 회복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들 단체는 "아베 정권은 한국 사법부의 판결을 존중하고 사죄, 반성하기는커녕 '국제법 위반' 운운하며 사법주권을 침해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피고 기업들에게 노골적으로 압력을 가하여 판결의 이행을 방해하고 있다. 아울러 일본정부는 한국에 대한 경제규제와 노골적인 배외주의를 선동하여 일본사회 전체를 '혐한의 광풍'으로 몰아넣는데 앞장서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또한 "일본제철, 미쓰비시, 후지코시는 판결에 따라 가해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하고 배상을 위해 먼저 나서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대화마저 거부한 채 일본정부 뒤에 숨어서, 1년이 지나도록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글로벌 기업을 자처하는 기업들의 비겁한 행태를 강력히 규탄하며, 피고 가해기업의 책임을 끝까지 물을 것임을 밝힌다"라고 밝혔다.

이들 단체는 한국정부를 향해서도 "한국정부는 강제동원 피해의 진상규명을 위해 한국 내에서 할 수 있는 조치들을 선제적으로 취하고, 소송 당사자뿐만 아니라 군인·군속 피해자 등 소송을 제기하지 못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을 포함하여 강제동원 문제의 포괄적인 해결을 위해 고민하여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10월 30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선 일본정부를 규탄하고, 대법판결 이행을 촉구하는 집회가 열리는 등 전국 곳곳에서 관련행사가 열렸다. 여전히 일본기업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문제가 끝났다는 일본정부 입장에 따라 판결이행을 거부하고 있어, 피해자들만 답답한 상황이다. 

이날 피해자 대리인단·민족문제연구소 등에 따르면, 지난해 대법원판결 이후 추가소송을 준비해왔고, 최근 일본 유명건설사 2곳에 손배 청구를 제기했다. 이에 강제동원에 책임을 져야 할 일본기업은 일본제철, 후지코시, 미쓰비시중공업 등 11곳이다. 대리인단은 관련기록을 검토하고 있어 앞으로 소송규모가 늘어날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대법원에서 승소판결을 받은 이춘식씨와 근로정신대피해자 양금덕씨는 최근 유엔 인권특별 보고관에게 진정을 넣었다. 국제사회에 호소해 꿈쩍하지 않는 일본기업과 정부를 압박하겠다는 뜻이다.  

또 일제 강제동원 문제를 국제사회에 고발하기 위해 100만 서명운동도 진행할 예정이다. 

한편, <교도통신>에 따르면, 일본정부는 한국 시민단체가 이날 부산의 일본총영사관 인근에 '항일거리' 현판을 세운 것에 대해 항의했다. 노동·시민단체로 구성된 '아베규탄 부산시민행동'은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피해 배상판결 1주년을 맞아 징용피해자를 상징하는 동상이 있는 공원부터 일본총영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까지 약 150m를 '항일거리'로 이름 짓고 현판을 세웠다.

일부 시민들은 현판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이를 막으려는 경찰 측과 몸싸움을 벌였으며, 이 지역을 관할하는 부산 동구청은 해당 현판이 불법 시설물로 철거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일본정부는 별도의 외교경로를 통해 한국정부에 항의하며 현판을 신속히 철거하라고 요구했다.

 

4. 미국의 방위비 압박 

미국의 뜬금없는 제안이 당혹스럽기도 하다. 안보 현안에서, 동맹의 가치보다 자국의 이익만 중시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이 겹쳐져 매우 유감스럽다. GSOMIA와 한·미 방위비분담특별협정(SMA)을 놓고, 한국정부를 연일 압박하고 있는 미국은 한미동맹 정신을 다시 되새기기 바란다. 

미국은 지난달과 지난주에 열린 SMA 체결을 위한 1, 2차 회의에서 한국의 분담금 대폭증액을 요구했다. 아직 초기라서 협상의 향방을 쉽게 가늠하기는 어려우나, 미국이 내년이후 적용될 한국의 분담금수준으로 현행보다 5배 이상 늘어난 50억 달러(약 6조원)라는 막대한 비용을 요구하고 있어, 팍팍한 협상이 예상된다. 

만약 미국의 요구대로 간다면, 주한미군지위협정(SOFA)까지 개정해야 하는 지경으로 치닫게 돼 해법도출이 더욱 복잡해지는데도, 미국 측이 과도한 논리를 고수하는 것 같다. 

주한미군주둔비용을 6배나 올리겠다고 압박하고, 일본의 경제보복은 외면한 채 GSOMIA 유지만 강권하고 있다. 여기에 이미 반환키로 한 전작권을 고리로 한국군의 해외파병을 강제하려는 등 동맹국의 역할과 책임은 거듭 방기한 채 철저히 이해관계만 좇는 모습이다. 

동맹의 가치를 금전적 가치로만 환산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인식에 당혹스럽다. 동맹은 양국 간의 견고한 신뢰와 지지를 근간으로 한다. 어느 한쪽이 납득하기 어려운 요구를 강요한다면 동맹의 균열은 불가피해질 수도 있다.

동맹은 국제사회에서 국가 간에 맺는 가장 높은 수준의 결속관계를 뜻한다. 가치를 공유하고 공동의 안보와 번영을 추구한다는 약속이면서 그것을 함께 실천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동맹관계가 이뤄지는 배경에는 언제나 공통의 이익이 있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베푸는 동맹은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다. 군사적 방어막이든, 자원이든, 유리한 세계질서이든 미국의 이익이 있는 곳에 미국의 동맹이 있고 한국도 그렇다. 

이런 상호적 관계를 트럼프는 돈이 드느냐와 돈이 되느냐의 금전적 관계로 바꿔가고 있다. 대단히 근시안적인 행태다. 그의 ‘동맹 비즈니스’에 제동을 걸지 못하면 미국은 결국 장기적 이익이 크게 훼손되는 상황을 맞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익의 훼손이 현실로 닥쳤다. 천문학적인 분담금 압박을 넘어 오랜 세월 유지돼온 동맹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가려 한다. 철저히 장사치의 셈법으로 접근하고 있다. 한국국민은 트럼프 정부출범 이후 미국으로부터 날아오는 각종 ‘안보 청구서’에 어리둥절해하고 있다. 

미국이 한미양국 간 진행 중인 제11차 SMA 협상에서 기존 주둔비에 더해 한미연합훈련과 미군 전략자산 전개 등 방위비용 등을 포함시킬 것을 강하게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는 앞선 10차 SMA에서 올해 한국이 부담할 주한미군 주둔비용을 전년 대비 8.2% 오른 1조 389억 원으로 합의했다. 8, 9차 협상에서는 물가상승률 정도를 반영한 4% 이내의 인상폭으로 5년짜리 협정을 맺었고, 10차 협상에서는 유효기간을 1년으로 했다.

미국은 지난해에도 전략자산 전개비용을 나누자며 ‘작전지원’ 항목 신설을 요구했다. 하지만 방위비분담금을 주한미군 한국인고용원 임금, 군사건설비, 군수지원비 등으로 한정해 온 취지를 수용해 물러섰다. 

미국 측 요구의 핵심은, ‘SOFA 규정에 없는 항목들을 분담금에 포함하자’는 것이다. SOFA에 의하면, 방위비분담금을 주한미군 한국인고용원 임금, 군사건설비(미군기지 내 시설건설), 군수지원비 등 3가지 항목으로만 쓸 수 있다. 

매년 100억 원씩 분담금을 늘리다가 올해 780억 원 넘게 증액해 처음으로 한국의 분담금이 1조 원을 넘었다. 한국이 내는 분담금 1조 389억 원의 5~6배나 되는 엄청난 액수다. 사실 미국은 한국이 주는 방위비분담금을 다 쓰지도 못했고, 심지어 한국이 낸 방위비분담금 중 일부를 주일미군에 전용하기까지 했다. 

미 국방부의 ‘2019 회계연도 예산 운영유지비 총람’을 보면, 방위비분담금을 포함한 주한미군의 직접주둔 비용은 대략 44억~45억 달러가 된다. 따라서 미국의 50억 달러 분담 요구는 주한미군 주둔비용 전체를 내라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는 과거 군인을 돈 주고 사서 운용한 ‘용병제’를 연상케 한다. 공통의 가치에 기반한 동맹 관계의 국가가 입에 올릴 얘기가 아니다.

더불어민주당 이철희 의원에 따르면, 미국 측 제시안에는 과거에는 포함되지 않았거나 분담했던 전략자산 전개비용, 연합훈련·연습 비용 등이 '준비태세 비용' 명목으로 추가됐고, 주한 미 군무원과 가족지원 비용까지 포함됐다고 한다. 

북한이나 중국의 군사적 위협이 있을 때 항공모함 같은 전략자산을 한반도 인근에 전개할 때도 돈을 우리가 내라는 것이고, 군인도 아닌 군속과 그 가족의 거주비용까지 대라는 것은 비상식적이다. 이런 요구는 SOFA를 뛰어넘는 요구다. SOFA에는 경비분담 대상을 '현역군인'으로 한정하고 있다.

결국 주둔군 지위협정을 바꿔서라도 돈을 더 내라는 말인데, 미군범죄의 처벌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불공정한 협약마저 뛰어넘는 무리한 요구가 아닐 수 없다.

미군의 한국 주둔은 북한의 위협에 대한 방위도 주요한 목적이지만,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동북아군사전략이 핵심적인 목표다. 다른 것을 거론 할 필요도 없이 사드(THAAD)의 한반도 배치를 두고 중국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돌이켜 보면 알 수 있다.

그만큼 한국은 동북아를 뛰어넘어 세계적으로도 미국의 가장 중요한 전략 요충지 가운데 한 곳이다.

더구나 한국은 세계에서 네 번째 미국무기 수입국이다. 지난 8년간 미국으로부터 사들인 무기만 35조 원 어치가 넘는다. 이런 주요 '고객'을 상대로 지위협정마저 뛰어넘는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은 대단히 부적절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미국은 합리적이고 적절한 수준의 협상원칙을 마련해야 한다. 우리 협상대표들도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과 무기수입국이라는 우월적인 지위가 있음을 잊지 말고 당당하게 우리의 요구조건을 관철시켜야 할 것이다.

미국국무부는 2차 회의일정을 알리며, 동맹과 파트너들에 미군 주둔비용을 공정하게 분담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이 공정한 몫을 더 기여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도 빼먹지 않았다. 

국무부가 1차 회의 전에는 하지 않았던 보도자료 배포를 통해 공평한 분담책임을 강조한 것은, 본격적인 줄다리기에 앞서 분담금 대폭확대 요구를 분명히 하려는 명분 쌓기다. 

일본, 독일과의 협상을 앞둔 미국의 입장에선 가이드라인이 되는 셈이라 더 거세게 나올 것으로 보인다. 데이비드 헬비 미국 국방부 부차관보는 한 심포지엄에서 한국의 분담금은 미국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한국의 번영을 위한 일종의 비용이라는 취지의 발언으로 압박 기조를 이어갔다. 

미국이 전략자산 전개비용까지 요구했다는 보도도 나왔는데, 이럴 경우 SOFA에 '작전지원' 항목을 신설해야 한다. 외교부당국자는 부인했지만, 미국이 언제든 내밀 수 있는 협상 카드이다. 

한·미 군 당국이 전시작전지휘권 전환에 맞춰 ‘한·미동맹 위기관리 각서’를 개정하는 과정에서 미국 측이 새로운 제안을 해서 파문이 일고, 우리 정부를 난감케 하고 있다. 

한미연합사의 위기관리 범위를 ‘한반도 유사시’로 규정하고 있는 이 각서의 문구를 ‘한반도 및 미국의 유사시’로 바꾸자고 한 것이다. 6·25전쟁 종전 뒤 1954년 11월 18일 발효된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근거한 ‘위기관리 각서’를 개정하자는 것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3조)은 한미연합사 작전지역을 ‘태평양지역’으로 한정하고 있다. 미국의 제안은 이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다. 한국 측이 문구를 변경하자는 미국의 제안을 거부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한국이 중동이나 남중국해 등에 파병할 경우 미·중의 패권 경쟁에 휘말릴 수 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빌미도 제공해서는 안 된다. 

한미상호방위조약에서 규정한 '태평양 지역'을 넘어서는 주장이고, 우리와 직접 관련이 없는 해외분쟁에 휘말리게 할 조항이다. '미국의 유사시'까지로 위기관리 범위를 확대할 경우 호르무즈 해협이나 남중국해 등 미군 작전 영역에까지 한국군을 파병, 협력해야 할 근거가 마련될 수 있다. 

미국 측은 전작권 이후 한·미 공동 대응을 더 명확히 하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한미연합사사령관을 한국군 장성이 맡아도 지금처럼 주한미군을 철저히 지키고,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미국으로 발사했을 때를 고려해 ‘미국 유사시’라고 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라면 새로 ‘미국 유사시’란 표현이 들어갈 이유가 없다. 유사시 양국군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자동적으로 개입하도록 돼 있다. 미국이 이 문구를 고집한다면, 방위비분담금 증액이나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 참여를 위해 한국을 압박하는 수단이라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한·미 군 당국은 이번 각서개정을 협의한 뒤 다음 달 서울에서 열리는 한미안보협의회(SCM) 때 양국 국방부장관에게 보고한다고 한다. 국방부는 기존 각서의 틀을 견지해야 한다. 한·미동맹을 이유로 한국군이 태평양 이외 지역으로 자동 파병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확고한 인식 아래 진행되는 '동맹역할 확대' 요구가 여러 방면에서 불거지는 모양새이다. 관례와 상식을 뛰어넘는 무리한 요구들이 아닐 수 없다. 탄탄한 논리로 치밀하게 대응해야 할 이유이다.

최근 발간된 가이 스노드그래스의 신간 ‘선을 지키며(Holding the Line)’’에 실렸고, CNN과 USA투데이 등 주요 외신 보도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스노드그래스는 매티스 전 미국 국방장관의 연설문담당 비서관을 지냈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시 주한미군 주둔의 대가로 미국이 뭘 얻을 수 있는지 집요하게 따졌고, "해외 주둔미군은 안보를 지키는 ‘이불’ 같은 역할을 한다는 매티스 전 장관의 설명에 "그건 손해 보는 거래"라고 호통을 치며 이렇게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8년 1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국방부 브리핑에서 "(한국이) 주한미군 주둔비용으로 1년에 600억 달러(약 70조원)를 낸다면 괜찮은 거래일 것이다." 라고 제임스 매티스 당시 국방부장관에게 한 말이다. 매티스는 시리아 철군 등 안보현안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충돌을 빚으며 지난해 말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트럼프가 돈을 앞세우며 동맹의 가치를 헌신짝 취급해온 것은 더 이상 뉴스도 아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 한국이 '최악'으로 각인돼 있다는 증언은 충격적이다. 한국에 개인적 감정이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즉흥적이고 공사(公私) 구분이 없는 트럼프는 사적 감정이나 선입견을 정책에 반영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가 불과 몇 달 전에도 한국에 대해 "엄청난 부자이면서 '우릴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라'를 지키느라 많은 돈을 잃고 있다"고 한 걸 보면, 트럼프의 취임 초 생각이 바뀌지 않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실제로 현재 진행되는 방위비분담금 협상에서 미 측은 이전보다 5배 이상을 요구했다고 한다. 트럼프는 그러면서도 "북한 미사일은 한국을 겨냥한 것이기 때문에 별문제 없다"며, 한국민 안위를 도외시한다. 미 행정부 내에는 트럼프를 제어할 '어른'도 거의 남아있지 않다. 

미국이 최근 방위비분담금 협상에서 전략자산 전개비용으로만 1억 달러(약 1170억 원) 이상을 요구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B-1B 전략폭격기가 한반도 방위를 위해 한 해 5~6회 출격한다는 사실에 터 잡아 계산한 비용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미군 측이 지난해 협상 때 해당비용으로 밝혔던 3000만 달러의 3배 이상이다. 미 CBS가 ‘한반도 전개를 위한 B-1B 출격 비용’이라고 보도한 액수는 훨씬 적은 회당 13억 4000만원이다. 1년 5회 기준으로 67억 원에 불과하다. 그런 터라 미국이 제시한 금액은 한국 측 시각에선 여간한 ‘뻥튀기’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올해에는 B-1B 전략폭격기가 한국 상공을 가로질러 날았던 과거와는 달리 남·동중국해에서 동해 쪽으로 방향을 바꾼 뒤 한반도 주변을 둘러 갔다고 한다. 

북한 문제를 고려한 한국정부의 요청에 따른 변화라는 게 미군 측 설명이지만, 사실상 한반도가 아닌 동북아 전체를 아우르는 전략자산 전개로 보인다. 동북아 안보비용을 한국에만 부담시키는 것 아니냐는 불만이 나오는 이유도 그래서다.

갑자기 늘어난 전략자산 전개비용은 트럼프 행정부가 방위비분담금으로 요구해 온 50억 달러를 맞추기 위해 부풀려진 듯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눈으로는 한국과 일본 등 동맹국이란 미국안보에 무임승차해 부당한 이익을 누려온 부도덕한 나라로 보이는 모양이다. 

지난주 방위비협상에서 미국 측은 군인이 아닌 주한미군 군속과 가족에 대한 지원비용, 컨트랙터라고 불리는 민간군사업체 용역비용까지 주문했다고 한다. 물가상승률에 준해 인상되던 방위비 분담금을 터무니없이 올리려는 행태는 트럼프의 인식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부분적 사실에 매몰돼 전체 그림을 보지 못하는 단견이다. 주한미군은 미국이 대부분의 비용을 대고 그 혜택은 한국만 누리는 존재가 아니다. 

무엇보다 주한미군은 중국은 물론 러시아의 위협을 견제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특히 서해를 가운데 두고 산둥반도 건너편에 자리 잡은 평택 미군기지는 미군의 어느 해외 부대보다 전략적으로 중요하다.

또한 주한미군 운용비를 미국이 일방적으로 부담하고 있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니다. 한국정부는 여의도 면적의 5배에 달하는 1400여만㎡의 부지를 제공하고 그 위에 10조원을 들여 최신식 기지를 지어 미군에 제공했다. 이런데도 공짜안보 운운한다. 

이대로 가면 “주한미군 대신 핵무장을 통해 스스로 지키자”는 비판의 목소리가 커질 게 뻔하다. 북핵문제도 해결되지 않은 데다 중국의 군사적 위협이 날로 가중되는 상황에서 한·미 어느 쪽에도 보탬이 되지 않는 불행한 상황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제라도 한국이 서로 보탬이 돼 온 소중한 동맹국임을 인식하고 지나친 요구를 자제해야 한다.

최근 쿠르드족의 뒤통수를 친 트럼프의 중동정책은 국제사회의 냉엄함을 보여줬다. 남의 일이 아닐 수 있다. 당장은 한·미동맹을 굳건하게 이끌어가는 게 우리 이익에 부합할 것이다. 그 관계가 언제 어찌 될지 모른다는 인식을 품고 대비하는 것 역시 장기적 이익에 부합할 것이다.

트럼프의 이런 인식이 크게 변하지 않은 만큼, 향후 방위비분담 협상의 난항은 불가피할 것이다. 정부는 미국 측의 과도한 요구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고, 시민사회의 반발도 이어진다.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가 안보정책을 둘러싸고 상궤에서 벗어나는 제안을 계속해오고, 당국은 제대로 설명도 하지 않고 있어 시민들의 불안감을 키우고 있다. 미국이 무슨 제안을 하는지 시민에게 알릴 것은 알려야 한다. 이를 토대로 기존 안보정책의 틀을 갑자기 바꾸려는 것은 동맹의 태도가 아니라는 점을 미국에 일깨워야 한다.

한·미는 2014년 제46차 연례 안보협의회(SCM)에서 ‘조건에 기초한 전작권 전환’ 원칙에 합의했다. 한국군의 핵심 군사능력 확보,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한국군의 필수대응능력 구비, 한반도·지역 안보환경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할 경우 전작권을 전환하기로 한 것이다. 

10월 30일 전직 국방장관들과 한미연합사령관들이 문재인 정부가 추진 중인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에 대해 “정치적 의사가 아닌 한국군의 조건과 능력에 따라 정해져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김동신 전 국방장관은 주미 특파원출신 모임인 한미클럽이 발행한 ‘한미저널 3호’에 실린 인터뷰에서 “한·미가 합의한 한국군의 북한 핵·미사일 위협 대응능력 구비 등 세부 조건들이 충실히 이행됐을 때 전작권을 전환 받으면 된다”고 했다. 

한민구 전 국방장관도 “전작권 전환은 국가안위와 직결되므로 정치적 합목적성이 정책적 합리성과 군사적 판단을 왜곡시켜선 안 될 것”이라고 했다. 제임스 서먼·빈센트 브룩스 전 한미연합사령관 또한 ‘전작권 전환조건 충족’에 방점을 뒀다.

 

5. 미 대사관저 월담 기습시위

10월 18일 한국대학생진보연합 소속 대학생과 회원 17명이 서울 중구 미국 대사관저 담을 넘어 마당에 들어가, 일시점거 농성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들은 ‘미국이 방위비분담금 50억 달러를 내라고 협박한다’며, 이는 ‘명백한 내정간섭’이라고 주장했다. 

대학생들이 외교공관을 무단으로 진입한 건 어떤 이유로도 동의할 수 없다. 다만, 이들의 행동이 미국의 과도한 증액요구에 대한 거부정서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엔 한·미 두 나라 당국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들의 거친 의사표현 방식과 주장이 전체 학생과 시민을 대표하지는 않지만, 미국의 과도한 증액 요구에 대한 우리 사회의 거부감과 반대 목소리를 보여주는 한 단면일 수 있다. 한국 내 일각의 반미정서를 미국정부가 가벼이 여겨선 안 될 일이다. 

한국은 이미 주한미군 주둔을 위해 방위비분담금 말고도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한국국방연구원이 지난해 5월 발표한 자료를 보면, 2015년 기준으로 한국은 방위비분담금을 빼고도 각종 면세와 이용료 감면, 공여 토지 무상임대 등 직간접 비용으로 4조원 이상을 부담하고 있다.

주한미군은 북한뿐 아니라 중국을 겨냥한 미국의 동북아 군사전략의 핵심 자산이다. 이런 점에서도 한국에 일방적으로 비용부담을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 한·미가 맺은 특수한 관계 등 여러 요소를 두루 반영해, 합리적인 수준의 분담금을 도출하길 바란다.

트럼프 행정부가 자국 이익 우선 정책을 편다고는 하지만, 주요 동맹국을 겨냥해 돈 중심의 주장을 거듭하는 것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쌍방 모두에 이익을 주는 안보협력을 위한 공동비용이라는 개념과 가치를 훼손하고, 돈으로 동맹을 사는 듯한 결과가 나올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도 과도한 방위비분담금에 대한 한국사회의 거부감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경제·예산 전문가로 협상팀을 새로 꾸린 한국도 미국의 분담금 인상 요구가 얼마나 비합리적인지 조목조목 따져 합리적인 수준에서 방위비 분담이 결정되도록 해야 한다.

사태의 근본책임은 미국, 특히 트럼프 대통령에게 있다. 자기 지지자들 앞에서는 ‘주한미군을 철수하고 싶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동맹에 대한 완전히 잘못된 인식이다. 동맹은 일방적 시혜가 아니다. 한·미동맹은 한·미 양국 공동의 이익에 기초하고 있다.

한반도에 전쟁이 나면 한국에 사는 16만 미국인도 위기에 처한다. 미국이 입을 경제적 손실도 막대하다. 2018년 한미 교역 규모는 1,316억 달러다. 미국은 한국의 2대 교역국, 한국은 미국의 6대 교역국이다. 

작년에 우리가 수입한 미국상품이 589억 달러, 2017년 우리가 수입한 미국 서비스는 300억 달러다.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하면 미국인이 한국에 판매하는 연간 약 100조원의 상품과 서비스 판로가 막힌다. 그래도 미국 일자리에는 아무 문제가 없을까?

한반도 위기는 곧 동북아의 위기다. 만약 미국이 동아시아 세력 전에 수수방관한다면, 결국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 주도권을 확보하는 세력은 나아가 미국에 도전할 것이다. 과거 미국과 대결했던 독일, 일본, 소련이 모두 그런 전철을 밟았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지키는 것은 자기들의 거대한 전략적 이익이 걸려 있다. 이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트럼프는 동맹국을 헌신짝 버리듯 하는 언사를 일삼고 있다. 미국의 지도자가 동맹을 단기적 경제관계로 환원하는데, 왜 우리는 장기적 신뢰로 보답해야 하나?

우리는 작년 GDP의 2.6%를 군사비로 지출했다. 미군이 주둔하는 독일은 1.2%, 일본은 0.9%에 불과하다. 작년 한국의 무기 수입액은 13억 달러로 세계 7위, 미국의 동맹국들 중에는 3위다. 상당액이 미국무기 수입에 사용됐다.

한·미 방위비협상 때마다 정부는 ‘용미론’(用美論)을 내세운다. 방위비를 더 분담해도 동맹에서 얻는 이득이 더 많으니, 괜찮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트럼프의 요구는 ‘용미론’을 무색케 한다. 

2009년 우리가 분담한 방위비가 7600억 원이었다. 작년에 1조원 남짓 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를 6조원으로 올리자면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게다가 현 정부 들어 도대체 미국에게서 얻은 것이 무엇인지 모호하다. 미국은 북핵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고 있고, 개성공단 금강산 등 남북협력 재개에도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일 갈등이 최악으로 치닫는 데도 적극적인 중재 역할은 보이지 않는다.

이제 더 이상 근거 없는 용미론에 기대 국민들에게 환상을 심어 주려 해선 안 된다. 오히려 미국에게 동맹이 공동의 이익에 기초한 것이라 당당히 말하고, 미국이 그래도 무리한 요구를 거듭하면, 우리 안보는 ‘우리 스스로 지킬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결연한 자세를 보여야 한다. 

앞서 10월 15일, 대진연 소속 대학생들은 방위비 분담금 6조 원 인상요구 철회를 규탄하며, 서울 중구 덕수궁 옆 주한미군 대사관저의 담을 넘었다.

당시 경찰은 기습시위를 벌인 19명을 연행했으며, 이중 7명에 대해선 공동주거침입과 공무집행 방해혐의 등으로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이에 10월 21일 중앙지법에선 영장실질검사가 진행됐다. 

10월 21일 한국진보연대 등 70여 개 사회단체는 서울 서초구 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입장문을 통해 "미 대사관저 진입 시위를 한 대학생들은 현재 주한미군지원금(9억 9000만 달러, 약 1조 2000억 원)의 5배인 6조 원으로 인상하라고 폭언한 해리스 주한 미 대사를 규탄한 의로운 학생들"이라며, "검찰은 대학생이 주거 침입했다고 하지만, 진짜 주거침입 범죄는 바로 미국이 저지르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우리나라 땅 여기저기 명당자리 찾아내 우리 국민을 쫓아내고 눌러앉아 지금껏 임대료 한 번 내지 않고 주인행세를 하는 미국이야말로 주거침입 범죄자다"라며, "이런 미국이 지금 적반하장 격으로 우리 국민의 혈세를 더 내놓으라고 강요하는데, 이를 두고 분노하지 않을 국민이 어디 있는가"라고 비판했다.

해리 해리스( Harry Binkley Harris Jr) 주한미국 대사를 향해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해리스 주한 미 대사는 대학생들이 폭력 연행된 후 '내 고양이는 무사하다'라며 한국국민이 자기 고양이만도 못하다는 어처구니없는 인식을 드러내며, 우리 국민을 우롱했다"라고 주장했다.
 
한국진보연대 한충목 상임공동대표는 "30년 전, 1989년 10월에 대학생 6명이 미 대사관저를 넘었다. 그리고 광주학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요구하고, 미국의 오만한 정책에 항의했다"라며, "당시 국민은 그들의 행동에 민주화운동, 평화와 통일운동으로 정의했다. 방위비 분담금 500% 올리라는 미국의 막말에 저항한 것이다. 이들이 대한민국의 자존심을 살렸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법으로 대학생들을 처벌할 게 아니라 '애국자'라고 훈장을 주어야 한다"라며, "5000만 명의 국민 자존심을 살려낸 대학생들을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 달라. 그것이 기성세대와 국가, 법원이 해야 할 사명이고, 국민의 명령이다"라고 말했다.

민중당 김은진 공동대표도 "법원은 대학생들의 행동에 대해 잘잘못 따지기 전에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원인을 살펴봐야 한다"라며, "미국은 지난 70년 동안 대한민국을 식민지로 취급해왔으며, 강제로 무기를 (우리 정부가) 사게 하고, 우리 땅을 군사기지로 만들어왔다"고 주장했다.

또한, "대학생들의 의롭고 상식적이며 지극히 정당한 투쟁을 전적으로 지지한다"며, "정부는 '외교공간에 대한 공격은 정당화할 수 없다'는 소리 할 때가 아니다. 해리스 대사를 즉각 추방하고, 미국에게 이 땅을 뜨라고 당당히 요구하라"고 말했다.

한국진보대학생네트워크 곽호남 대표는 "대학생들은 주권을 지키고, '식민지'와 '속국' 같은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미 대사관저 담을 넘었다"라며, "대학생들이 당당하게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나가게 하는 게 정부의 역할이다. 미국의 내정간섭에 단호히 맞선 의로운 대학생들을 즉각 석방하라"라고 말했다.

한편, 대진연은 지난 10월 18일부터 온라인을 통해 대학생들의 석방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으며, 현재(10월 21일 기준) 약 6000명 이상이 탄원서에 서명했다고 밝혔다.

10월 20일 주한 미국 대사관저에 집단 난입해 농성을 벌인 한국대학생진보연합 회원 7명에 대해 공동 주거침입 등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이들은 ‘미군 지원금 5배 증액 요구 해리스는 이 땅을 떠나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방위비 분담금 인상에 반대한다고 외쳤다.

정치적 목적의 미 대사관저 난입은 1989년 전대협의 점거 농성 이후 30년 만이다. 주한 미 대사관은 즉시 발표한 성명을 통해 우리정부가 모든 주한 외교공관 보호를 위한 노력을 강화해줄 것을 촉구했고, 미 국무부도 우려를 표명했다. 빈 국제협약에 따라 외교공관과 관저는 불가침의 보호를 받게 되어 있다. 

한편 국방부가 2012년 중단한 중국과의 재난구호협정을 7년 만에 다시 체결하기로 했다. 군 병력이 투입되는 재난구호는 군수지원협력의 초기단계다. 특히 일본과의 GSOMIA를 종료하기로 결정한 시점에, 중국과 군사협력 관련 협정을 새로 맺으려는 건, 한·미·일 3국 안보협력에 상당한 부담요인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10월 21일 박재민 국방부 차관과 샤오위안밍(邵元明) 중국 연합참모부 부참모장(중장)은 베이징(北京)에서 국방전략대화를 가졌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ㆍ사드) 갈등이 불거진 2014년 이후 5년 만의 자리다.

국방부는 회담 보도 자료에서 “중국과 재난구호협정 체결을 추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앞서 한·중 국방당국은 2012년 7월 군수협력회의를 열고 ‘재난구호 교류협력 양해각서(MOU)’를 맺으려 했다. MOU는 국가 재난상황에 따른 구호협력과 복구훈련 등의 내용을 담았다. 

당시 양측은 MOU 체결 날짜까지 공지했지만, 일본과의 GSOMIA를 정부가 ‘졸속 처리’하려다 반대여론이 거세지면서 중단된 직후라 중국과의 군사협력도 덩달아 유탄을 맞아 무산됐다. 그 여파로 2001년 시작된 한·중 군수협력회의는 2013년 이후 아예 열리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국방부의 이날 발표는 7년 전 MOU조차 무산된 군 당국 간 재난구호 협력의 수위를 협정으로 한 단계 끌어올리겠다는 의미다. 장기적으로 군수지원협정(MLSA)으로 발전될 수도 있다. 이명박 정부 당시 아랍에미리트(UAE)와 비밀리 체결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 논란이 컸던 사안이다. 

GSOMIA와 MLSA는 국가 간 군사협력을 상징하는 양대 축으로, 일본과는 군수협정을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특히 민간차원의 협력도 포함하는 재난구호에 국방부가 적극 나선 건, 일본을 대신해 중국과 군사협력을 강화하겠다는 의미다. 지난해 3월 신설된 중국 응급관리부는 우리 행정안전부와 이미 재난구호 협력수준을 높이고 있다. 올해 12월에는 한·중·일 3국이 재난구호 회의도 열 예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방부가 끼어들자 중국 측은 “우리는 재난구호를 담당하는 부처가 따로 있다”고 의아해했다고 한다. 외교 소식통은 “국방차관이 와서 왜 재난구호협정을 맺자고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고 말했다. 

한국정부 부처끼리도 의견 조율이 제대로 안 됐다는 얘기다. 사드 배치 이후 악화된 한·중 관계를 만회하기 위해 중국과의 군사협력에 힘을 실어주려다 자칫 중국에 뒤통수를 맞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대목이다. 이처럼 논란이 일자 국방부는 2시간여 만에 보도 자료를 다시 내고 ‘재난구호협정 체결 추진’을 수위가 낮은 ‘재난구호협력 추진’으로 수정했다.

이와 함께 한·중 양국은 현재 각각 1개선을 운영하고 있는 해ㆍ공군 간 직통전화(핫라인)를 추가로 설치하는 한편, 올해 상반기로 추진하다 미뤄진 국방장관의 방중을 조속히 재개하기로 했다. 한국 국방장관은 2011년 이후 8년간 중국을 방문하지 못하고 있다.

 

2019. 10. 31
사회적협동조합연합회중앙회 회장 한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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