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들께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자녀에게 왜 책을 읽게 하시나요?

우린 이 질문 자체가 의아할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나중에 공부 잘 하라고 읽는 것이지요.” 책은 공부를 잘 하게 하는 밑거름인데 그걸 몰라서 물어? 하는 반응이 나오겠지요.

그럼 다시 질문 하나 더 하겠습니다. 동화책은 공부하는 데에 어떤 도움이 될까요?
이 질문에는 말문이 막힐 수도 있습니다. “음…… 뭐에 좋을까요?”

책은 지식을 얻는 데에 분명 좋은 통로이다. 과학, 미술, 경제, 정치 등등 어떤 분야의 지식이라도 책으로 기술(記述)이 가능하다. 그런 지식을 얻는 것과 동화책은 거리가 있어 보인다. 어린 아이들이 읽기에도 글이 적고, 어려운 내용도 아니고, 기승전결이 분명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엄마가 머리맡에서 잔망스러운 목소리로 1인 다역(多役)을 소화해가며 4~5권씩 읽어주는 소리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잠이 든다. 대체 동화책은 어떤 매력이 있는 걸까?

아이들은 엄마가 동화책 읽는 시간을 무척 기다린다. 왜일까? 책을 읽고 싶지만 아직 한글을 모르는 어린 아이라서? 간단하다. 엄마랑 같이 있는, 엄밀히 말해 엄마가 아이에게 집중해서 딱 붙어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동화책을 읽는 시간은 엄마와 함께하며 정서적 공감을 하는 것이다. 엄마가 공룡이 되면 아이도 공룡이 되고, 엄마가 신나게 자전거를 타면 아이도 신나게 자전거를 타는 느낌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엄마의 생각에 ‘이게 뭐 재미있나?’하는 책인데도 아이는 수십 번을 읽어도 늘 깔깔대며 웃고, 또 다음에도 읽어달라고 한다. 그 책을 읽으면서 엄마와의 좋은 시간을 보낸 경험을 계속해서 느끼고 싶은 마음이 그 내면에 잠재된 것이다. ‘엄마와 함께한 것’ 그 자체로 책 읽기는 즐거운 경험이다.

그런데 한글을 읽게 되면서부터는 부모들은 아이가 스스로 책을 읽기를 원한다. 그러면서 아이는 부모 없이 ‘혼자’ 책 읽는 시간이 늘수록 자연스럽게 책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게 된다. 초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는 ‘학습’을 위한 독서만 있지 ‘정서적 공감’을 위한 독서는 사치가 된다. 수학 공부에 도움이 되는 책, 논술 실력을 단기간에 향상시키는 책, 영어 단어를 빠르게 암기하게 해 주는 책…… 아이들의 손에는 이런 책이 더 많이 들려 있고, 그나마도 고학년이 되면 시험을 위한 문제집 외엔 손에 잡지도 않는다. 부모님과 나누는 대화도 그런 반경에서 넘어가지 않는다.

그러다가 사춘기가 오면서 아이는 변해간다. 부모의 말에 대꾸도 없고, 친구들과 늦은 시간까지도 어울려 다니고, 휴대폰만 바라보는 아이의 모습에 부모는 당황하고 화가 난다. 그때 부모는 ‘오랜만에’ 정서적 교감을 시도한다. 그러나 아이에게서 돌아오는 건 “엄마보다 친구가 더 좋아요.”라는 가슴 무너지는 대답이다. 내 품에서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라고 말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그 품을 벗어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아이를 어찌할까?

아이가 친구를 좋아하는 이유는 엄마를 ‘좋아했던’ 이유와 다르지 않다. 현재 누구와 정서적 공감이 활발히 이루어지느냐 하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어릴 때는 엄마와 나누던 공감대가 이젠 친구들로 옮겨진 것이다. 내 말을 잘 들어주고, 고민거리도 비슷하니 대화가 잘 통할 수밖에 없다. 부모들이 아이의 정서에 귀 기울이지 않고, 지식에 눈을 돌리면서 아이들은 정서를 나눌 수 없어 외로웠을지도 모른다.

결국 부모와 책을 통한 유대관계가 잘 형성이 되면 아이는 책을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책을 읽는 시간은 공부하는 시간이 아니라 충분한 정서 교감과 소통, 공감에 유익한 시간이어야 한다. 아이만 책을 읽어서, 부모만 열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함께’라야 의미가 있는 시간인 것이다. 좋은 추억 만들기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잘 만난 책 한 권에서 시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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