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협동조합연합회중앙회 창립 1주년 기념 행사에서 발언하는 한상석 사회적협동조합연합회중앙회장.
사회적협동조합연합회중앙회 창립 1주년 기념 행사에서 발언하는 한상석 사회적협동조합연합회중앙회장.

7월 1일 일본 정부가 반도체 등의 핵심소재 3가지에 대한 수출규제를 강화한 데 이어, 8월 2일에는 한국을 이른바 백색(수출심사 우대국)에서 제외함으로써 한국과 일본은 사실상 경제전쟁에 돌입한 상태다.

한·일 갈등에서도 청와대와 정부는 명분을 앞세우고 있다. 게다가 일본이 무역 보복이라는 부당한 칼을 빼들었기 때문에 정면으로 맞설 수밖에 없다. 일본과의 경제전쟁은 국가 간에 서로 분업 체계를 갖춘 상황에서, ‘특정 제품의 수출을 대한민국에 대해서만 통제한다’고 공격해서 일어났다.

지난해 대법원의 배상 판결(징용피해자 ‘인권’ 문제)에 경제보복으로 나선 일본에겐 결코 지지 말아야 한다. 이는 일본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명백하게 밝혔고, 국가 간 협상으로 개인 청구권이 소멸될 수 없다는 국제법 흐름과도 일치한다.

작금의 한·일 관계 악화는 과거를 직시하지 않는 일본에 기본적 책임이 있다. 삼권분립의 정신에 따라 대법원이 내린 판결을 ‘한국 정부가 막지 않았다’며 책임을 주장하는 것은 무리다. 한·일 관계는 과거사에 대한 진정한 사과 위에서만 재출발할 수 있다.

일본이 한국을 백색국가에서 제외하자, 한국도 일본을 백색국가에서 빼는 맞대응을 했다. 한국의 조치는 다음 달 시행될 예정이다. 일본이 시작한 싸움은 피할 수 없게 됐다. 전화위복의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일치단결하여 싸워야 하고, 그 싸움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

지금 온 국민이 떨쳐 일어나 극일(克日)을 외치고 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위기는 기회의 다른 이름이다. 위기(危機)는 위험과 기회의 합성어라고 한다. 위기는 새로운 출구를 찾으면 '기회'가 되고, 실패하면 기회는 지나가고 '위기'만 남는다.

위기가 닥쳤을 때 드러난 약점을 인정하고 극복할 방안을 찾는다면 더욱 성장할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일본 경제 도발로 촉발된 한·일 갈등이 우리에겐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을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비뚤어진 역사를 바로잡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장기적으로 제대로 준비한다면 못해 낼 일이 아니다. 반드시 해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지금 한국은 일본과 2개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는 아베의 일본과 벌이는 역사전쟁과 경제 전쟁이다.

식민지배가 불법이라면 강제동원의 근거인 일제의 ‘국가총동원법’과 ‘국민징용령’은 효력이 없다. 강제동원 배상판결을 문제 삼는 근저에는 식민지배가 합법이라는 인식이 있다. 1965년 한·일 기본조약 이후 억지로 봉합된 상태인 양국의 인식차가 단기간에 좁아질 리 없다.

일본은 한국 경제의 핵심인 반도체산업에 타격을 입히려는 의도를 명백히 하고 있다. 여기에는 헌법 개정으로 ‘전쟁할 수 있는 보통국가가 되겠다’는 열망과 함께 한때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떵떵거렸던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욕망이 뒤섞여 있다. 한국이 위안부 문제와 강제동원 문제를 제기해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위상을 깎고, 경제적으로 강력한 경쟁상대로 부상한 탓이다.

8월 15일 문재인 대통령의 74주년 광복절 경축사 메시지는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 문구에 담긴 극일(克日)·자강(自彊) 의지 표현과 ‘지금이라도 대화와 협력의 길로 나온다면 기꺼이 손을 잡을 것’이라는 대일 메시지였다.

문 대통령은 “저는 오늘 어떤 위기에도 의연하게 대처해온 국민을 떠올리며 우리가 만들고 싶은 나라,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를 다시 다짐한다”며 “일본의 부당한 수출규제에 맞서 우리는 책임 있는 경제 강국을 향한 길을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지금이라도 일본이 대화와 협력의 길로 나오면 기꺼이 손을 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27분 간 이어진 경축사 중 직접 일본을 꼬집은 것은 “이웃나라에 불행을 주었던 과거를 성찰”하라고 주문하면서 “먼저 성장한 나라가 뒤따라 성장하는 나라의 사다리를 걷어차서는 안 된다”거나 일본의 수출 규제를 “부당”하다고 비판한 대목이 전부다.

그 보다는 동아시아에서 “침략과 분쟁의 시간”보다 “훨씬 긴 교류와 교역의 역사”가 있었음을 상기시키면서 “협력해야 함께 발전하고, 발전이 지속 가능”하다며 “공정하게 교역하고 협력하는 동아시아”를 함께 만들어가자는 메시지가 주류였다. “자유무역 질서를 지키고 동아시아의 평등한 협력“을 위해 “경제 강국을 향한 길을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라며 ‘자강(自彊)’에 방점을 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본에서 열린 전몰자 추도식에서 전후 세대인 나루히토 새 일왕은 선대가 했던 대로 “깊은 반성”과 “두 번 다시 전쟁의 참화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뜻을 표시했다. ‘깊은 반성’은 지난 4월 퇴위한 아키히토 상왕이 2015년 추도사부터 해온 말이다. 갓 출발한 레이와(令和) 시대에도 부친이 견지해온 ‘평화주의’를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4년 전 아키히토 상왕이 ‘깊은 슬픔’에서 사죄 수위를 격상시킨 표현이다. 그해 아베 총리가 “전쟁과 아무 관계없는 우리 아이들과 손자, 다음 세대 아이들에게 계속 사죄의 숙명을 짊어지게 해선 안 된다”며 전쟁과 식민지배를 사죄한 ‘무라야마 담화’를 무력화하자, 일왕이 직접 견제·비판한 것이었다.

아베 총리는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에 공물을 보내고, 300만 명의 전몰 희생자 성격만 열거하며 가해자의 책임은 사죄하지 않았다. 이틀 전엔 외할아버지인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 묘소를 다녀오며, ‘개헌 논의를 본격 추진하겠다’는 뜻도 분명히 한 터다.

1993년 이후 ‘패전일’인 8월 15일마다 해오던 총리들의 ‘반성’과 ‘애도’가 2012년 아베 총리 재집권 이후 7년째 끊겼다. 야스쿠니신사에 극우 성향 의원 50명은 직접 참배까지 했다.

하루 전인 14일 한국에서는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의 날’ 국제 학술회의에서 중국 연구자들은 전시 성범죄와 관련해 일본군 전범들이 직접 쓴 ‘자백서’ 등을 공개했다. 사단장급 전범들이 쓴 자백서에는 “위안소를 만들라고 명령을 내렸다”거나 “중국과 조선의 여성을 유괴하거나 속여서 끌고 오라고 했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2015년 말 아베 정부는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에 제출한 공식 답변서 등을 통해 ‘위안부’ 강제 연행을 확인할 수 있는 서류가 없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내세우고 있다. 자신들의 조사 범위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과 한국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문서까지 아울렀다고도 주장한다. 그렇다면 자기 나라 장성들이 직접 작성한 서류를 조사하지 못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지난해 10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문은 말한다. ① 1941~43년 모집돼 일본에 간 원고들은 ‘일본 정부와 구 일본제철의 조직적인 기망(欺罔·속여 넘김)’으로 ‘생명이나 신체에 위해를 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열악한 환경에서 위험한 노동에’ 종사했다. ② 구체적인 임금액도 모른 채 강제 저금을 해야 했고 ③ 감시받다 탈출 시도가 발각되면 혹독한 구타를 당했다.  
 
‘모집’이든, ‘동원’이든, ‘징용’이든 본질은 하나였다. 반인도적 불법행위다. 보통 명사화된 그 상징어가 강제징용이다. 어찌하여 일본은 ‘기망’을 ‘로망’이라고 말하고, 피해자들의 절규를 가해자의 프로파간다로 대체하고, 현실의 구체적 고통을 허울뿐인 통계로 지우려 하는가.

“자원해서 열심히 일 한다”며 조선인들에게 ‘지성공(至誠工)’이란 이름을 붙여 강제노동을 은폐했던 전범기업과 다른 게 무엇인가. 지금의 ‘강제징용 부정하기’는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 부정하기’, ‘5·18 부정하기’와 다르지 않다. 작은 허점과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분명히 존재하는 역사를 부정하고 모욕한다.

일본 아사히신문이 17일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이 과거사에 대한 반성의 뜻을 표명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아사히는  ‘일본과 한국을 생각한다-차세대에 넘겨줄 호혜관계 유지를’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게재해 “한국을 냉대해서는 안 된다”며 이렇게 지적했다.

아사히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강제성을 인정한 1993년 ‘고노 담화’와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사죄한 2010년 ‘간 나오토 총리 담화’를 언급하며 “아베 총리가 이런 견해(담화)에 대해 주체적으로 존중하는 자세를 보이면 한국에 약속 준수를 요구하는 것의 설득력이 늘어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아사히는 “아베 정권이 수출규제 강화를 단행해 사태를 복잡하게 한 것은 명확하다”면서 “문 정권에 문제가 있다고 해도 정치·역사 문제를 경제까지 넓힌 것은 적절하지 않았다”고 아베 정권을 비판했다.

도쿄신문은 “고노 다로(河野太郞) 외무상이 주일 한국 대사의 발언을 끊으며 ‘무례하다’고 비판하고, 수출규제 문제로 일본을 방문한 한국 측 담당자를 경제산업성이 냉대한 것이 한국의 여론을 자극했다”며, “일본 측에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한일관계의 악화는 일본에게도 마이너스(-)”라며 “아베 정권이 한국과 적극적으로 대화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과거사에만 얽매여 강(强) 대 강(强) 대치를 할 게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해법을 찾아야 한다. 구동존이(求同存異)의 자세로 한·일 관계에 임할 필요가 있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이 바로 그런 정신을 담고 있다. 아베 정부도 과거사에 대한 자성을 토대로 미래를 공유하자는 메시지를 전향적으로 수용해야 마땅하다.

최소한의 겉포장만 갖출 수 있다면 철저하게 내용물을 추구하는 것이 정글 같은 국제무대에서 살아남는 길이기도 하다. 등소평의 흑묘백묘론, 광해군의 중립외교, 서희의 강동 6주 담판 등이 이런 맥락에서 모범 사례로 거론되는 것이다.

12일 원로급 인사 67명이 참여한 한국 시민단체인 동아시아평화회의는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의 정신과 해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얼마 전 일본 지식인 77명이 시작한 '아베 정권의 한국 수출규제 철회 촉구' 서명운동에 화답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 SNS에 올린 추모 글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김 전 대통령은 한국과 일본이 걸어갈 우호·협력의 길에도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며 “국민이 잘사는 길, 항구적 평화를 이루는 길, 한일 협력의 길 모두 전진시켜야 할 역사의 길”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1998년 오부치 일본 총리와 함께 발표한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 십 공동선언’은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명문화했다”고 덧붙였다.

한-일 관계가 ‘경제전쟁’을 방불케 하는 요즘 21년 전인 1998년에도 출구가 안 보이는 터널을 달리는 것 같이 한일관계가 위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발언 이후 양국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다, 급기야 YS 퇴임 한 달 전 일본 정부는 어업협정 파기를 일방 통고했다.

이런 상황에서 DJ는 취임하자마자, 외환위기 극복과 북한 핵·미사일 문제 대응을 위해 양국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우리에게 외교는 명줄"이라고 하며, 1998년 10월 8일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와 발표한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 십 공동선언'은 일본총리의 과거사 공식 ‘사죄’와 일본 대중문화 개방으로 상징되는 성과물이다.

당시 오부치 총리는 "과거사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사죄"를 언급했고, 김 전 대통령은 "미래 지향적 관계 발전을 위해 노력하자"고 화답했다. 양국 정상이 과거를 직시하면서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미국과의 동맹 등 양국이 공유하는 보편적 가치와 국익을 최우선순위에 놓은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이 당시 일본 의회에서 "일본에는 과거를 직시하고 역사를 두렵게 여기는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고, 한국은 일본의 변화된 모습을 올바르게 평가하면서 미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은 지금도 양국 지도자들이 경청할 만한 대목이다.(당시 국회연설에 대해 일본 언론과 정치권은 극찬을 보냈지만, 유독 아베 신조 당시 자민당 중의원 의원만 비판적이었다)

1998년 10월 이전에 일본이 정확히 한국을 상대로 사과한 적은 없다. '국적을 불문하고 사과한다'라거나 '아시아 여러 나라에 사과한다'고 했을 뿐이다. 그런 일본을 상대로 '한국민들에게 사과한다'는 표현을 받아냈다는 점에서 김대중·오부치 선언은 획기적이었다.

일왕(천황)이 한국 대통령과의 연회 중에 구두로 사과하는 게 아니라, ‘일본 정부수반이 문서 형태로 사과했다’는 점이다. '1998년 체제'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1998년의 이 선언은 획기적 내용을 담고 있다. 과거사·한반도·정치·경제·군사·문화·국제문제 등에 걸쳐 한일관계 전반을 미래지향적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 의의가 높았지만, 과거사 문제에 관한 일본의 태도를 전향적으로 바꾸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컸다.

1998년에는 연 초부터 일본이 어업 관계를 일방적으로 파탄 내는 일이 있었다. 정월 23일 하시모토 류타로 내각이 한일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해버린 것이다. 이때 외무대신이었다가 그해 7월 30일 총리가 돼 10월 8일 공동선언의 주역이 된 인물이 오부치 게이조다.

그런데 공동선언의 한쪽 주역인 오부치 게이조는 재임 중인 2000년 4월(당시 63세) 뇌경색으로 쓰러지고, 4월 5일 모리 요시로 내각이 새롭게 등장했다. 오부치는 5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2001년 7월 일본과 맺은 20억 달러 규모의 한일 통화스와프는 국익을 우선한 실용외교의 대표적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700억 달러까지 규모가 늘어난 한일 통화 스와프가 2012년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 이후 일본이 만기연장을 잇달아 거부하면서 종료된 것은 두고두고 아쉬움을 남긴다.

얼마 안 있어 한일관계는 다시 악화됐다. 우익단체인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의 활동 때문에 2001학년도 중학교 교과서에서 위안부 내용이 삭제되거나 축소되고, 2001년 취임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군국주의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여 이웃나라들을 자극하고 나섰다.

2013년 집권한 아베 정부는 저성장, 저물가 상태에 빠진 일본 경제를 살리기 위해 ‘무제한 양적완화’와 ‘공격적 재정지출’을 내세웠다. 중앙은행이 계속 금리를 낮추며 막대한 양의 돈을 풀어 엔화 가치 상승을 막고 정부의 재정투자로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것이다. 1990년부터 2009년까지 20년 동안 0%대 성장률을 기록한 일본 경제는 아베 노믹스에 힘입어 지난해 1.8% 성장했다.

2002년 5.5%로 정점을 찍었던 실업률도 지난해 2.4%를 기록, 1992년 이후 26년 만에 가장 낮았다. 이 같은 경제지표에 대한 자신감은 아베 정부의 대외 강경노선의 원인으로도 분석된다.

8월 초순(1~10일) 대일 수출이 전년 동기 대비 32% 급감하면서 총수출액도 22%나 줄었다. 그런가 하면 일본 지자체들이 한국인 관광객 급감으로 비상이 걸렸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이날 발표한 ‘한·일 여행절벽의 경제적 피해와 시사점’ 보고서에서 한국의 관광 불매운동 여파로 내년 일본 경제성장률은 0.1%포인트 떨어지며, 고용이 9만 5785명 줄어들 것이라고 분석했다.

일본의 반도체 3대 품목 수출규제와 백색(수출절차 우대국) 제외는 일본이 한국에 대해 가해자로서의 책무를 더 이상 지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일본의 행동에는 표면적으로 강제징용 배상판결에 대한 불만이 있겠지만, 한국이 경제·안보적 차원에서 자신들의 예상 범위를 벗어나고 있는 데 대한 당혹감이 근저에 깔려 있다. 일본 정부의 수출규제가 남·북·미 정상의 판문점 회동 다음날 발표된 것은 이를 잘 말해준다.

한국 기업들은 일본의 반도체 핵심 소재 3종에 대한 수출 규제에 대응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핵심 소재 3종의 재고를 확보했다. 해외 공급처를 발굴했으며, 대체재 테스트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일부 핵심 소재의 생산시설도 구축하고 있다.

가장 큰 패착은 일본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신뢰를 잃었다는 점이다. 최대 수요처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일본 소재의 수입에만 매달릴 수 없다는 교훈까지 얻었다. 아베가 추후에 경제보복을 철회해도 일본 기업들의 신뢰 상실과 고객 이탈은 되돌리기 힘들 것이다. 극단적으로 ‘아베 기업 파산론’까지 거론되고 있다.

‘물건을 안 판다’는 일본의 위협이 먹히는 어이없는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그건 정부와 기업의 몫이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반도체 식각과 세정 공정에 쓰이는 고순도 불화수소(에칭가스)는 국내 업체인 솔브레인이 올해 9월 제2공장 증설을 마치면 연내에 일본산을 대체할 가능성이 높다. 솔브레인은 6년 전부터 자체 불산정제 공장을 운영하면서 일본 수준의 고순도 불산(액체)을 이미 공급하고 있다.

SK머티리얼즈와 후성이 고순도 불화수소 양산을 준비하고 있다. 업계는 디스플레이 소재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역시 코오롱인더스트리 등 국내 업체로 대체가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SKC도 올해 하반기 완공을 목표로 폴리이미드 필름 생산시설을 짓고 있다.

문제는 웨이퍼에 자외선을 쬐 회로를 그릴 때 쓰는 감광제인 극자외선(EUV) 포토 레지스트다. EUV 포토레지스트는 삼성전자의 7㎚급 파운드리 사업이나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칩 생산에 반드시 필요하다. 국내 업체인 금호석유화학과 동진쎄미켐이 포토레지스트를 만들고 있지만 아직 기술수준은 일본에 미치지 못한다. 이 때문에 반도체 업계는 벨기에 등에서 EUV 포토레지스트 재고를 확보하고 있다.

차세대반도체연구소는 실리콘 반도체를 대신할 갈륨비소 반도체와 전자의 ‘스핀’을 활용한 차세대 반도체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갈륨비소 반도체는 전자의 이동속도가 10배 빠르고, 전력은 10분의 1 정도 낮아져 전체적으로 실리콘 반도체에 비해 6배 정도의 성능 향상을 꾀할 수 있다. 갈륨비소 웨이퍼는 일본이 추가로 규제할 가능성이 높은 실리콘 웨이퍼를 대체할 수 있다. 스핀 반도체는 전류를 흘렸다가 차단하는 방식이 아니라 전자의 스핀만 바꾸면 돼, 속도가 빠르고 전력 소모를 크게 낮출 수 있다.

전후 고도성장으로 지난해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달성한 한국은 한·일 관계를 리셋 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빈부격차 등 문제도 적지 않지만 전후 최빈국이던 한국이 단기간에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 것은 세계 역사상 유례가 드물다.

지난해 우리의 대일무역적자는 29조 2800억 원이다. 한국경제의 대들보인 반도체 제조용 장비·부품은 6조 7800억 원 적자였다. 세계 모든 나라가 가장 잘하는 것을 집중적으로 만들어 다른 나라와 거래함으로써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게 무역의 기본이지만, 이제 우리는 단순한 무역수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수입을 못하면 생산이 불가능한 생존의 문제고, 우리 경제 규모가 커지고 자신감이 높아질수록 위험도 깊어간다.

이번 수출규제 조치로 인해 가장 타격을 받는 한국의 산업은 반도체다.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향후 일본에서 핵심 소재와 부품을 제때 수입하지 못하거나 거부당하면 한국 경제는 현 국내총생산(GDP) 1조 7000억 달러대에 주저앉거나 그보다 훨씬 아래로 추락할 우려가 높다.
  
인공지능(AI)의 발전에 따라 사물인터넷(IoT) 시대가 다가오면서 반도체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앞으로 반도체 수요가 급증하면 일본이 반도체 강국인 한국에 역전당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세계시장을 주름잡던 일본의 반도체 기업들은 자국산 전용 생산 장비를 공급받는 데 집착하다 생산 비용이 급증하면서 1990년 후반 들어 낙오하기 시작했다. 당시 유럽에서 값싼 생산 장비를 들여와 가격경쟁력을 확보한 한국 기업들에 시장을 빼앗기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의 작년 수출 총액 6054억 달러 중 반도체 비중은 21%로서 1267억 달러에 달했다. 반도체 수출액이 두 배만 늘더라도 1300억 달러가량 많은 일본의 수출 총액을 따라잡는다.

지난해 일본의 국내총생산은 4조 9000억 달러를 기록했는데, 10년 내 사물인터넷 시대가 본격 개막되면 한·일 간 경제력 역전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실제 국제통화기금은 최근 구매력 평가 기준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이 2023년 일본을 추월할 것으로 전망하기도 했다. 올해 구매력 평가 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은 한국(3만 7542달러)과 일본(3만 9795달러)이 각각 32위와 31위에 랭크됐다.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이 지난 4월 24일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에 133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했고, 이날 정부도 문재인 대통령의 의지에 따라 비메모리 반도체 산업 지원책을 발표했다.
  
아베 정부는 이번 규제 조치 직전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소재와 부품 재고량을 이미 파악했다. 이런 준비 끝에 반도체 3대 소재 수출규제라는 ‘전격 Z작전’을 감행한 것이다.

한국 반도체산업에 대한 아베의 공격이 ‘한국 대 미·일 반도체 전쟁’으로 확산될 수도 있다. 삼성전자의 133조원 투자 등 비메모리 투자 강화가 미국의 반도체산업에 타격을 가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미국과 ‘반도체 공영 시대’를 열어나가야 한다. 일본의 규제가 계속돼 한국의 반도체산업이 무너지면 그 수혜는 고스란히 중국에 돌아갈 것이다.

일본의 소재·부품을 수입해 완제품을 최종 조립하는 분업구조가 고착화돼 왔고, 이 ‘약한 고리’를 일본이 치고 들어오긴 했지만 이 역시 극복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어렵겠지만 핵심소재·부품·장비의 공급 다변화와 국산화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대·중소기업 간 상생의 생태계를 조성해 한국 경제의 균형발전을 꾀할 모처럼의 기회이기도 하다.

일본 소재와 부품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외부환경 변화에 쉽게 휘둘리게 되는 종속성 탈피 노력도 게을리 해선 안 된다. 일본이 최근 백색 배제 때 개별허가 품목을 추가하지 않았고, 개별허가 품목으로 묶은 포토레지스트 수출을 허가했으나, 수출 통제를 무기 삼아 자기들 뜻대로 한국을 움직이려는 태도는 여전하기 때문에 더 그렇다.

한편 삼성전자는 지난 몇 년 간 주주환원이라는 명목으로 자사주를 매입하여 소각하는 데에만 20조원 이상을 썼는데, 오래전부터 보유하고 있던 자사주의 소각까지 합하면 그 규모는 훨씬 더 크다. 영업이익의 많은 부분을 도전적 투자와 인재 양성에 소홀하면 오래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대기업과 중견기업의 하청에 의존하는 중소기업들은 항상 단가인하 압력과 기술탈취 위험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실제로 중소기업 1곳당 연구개발 투자 규모는 계속 줄어들고 있어서, 2007년 1곳당 6조 3천억 원에서 2017년에는 3조 4천억 원으로 축소됐고, 연구개발 종사 인력도 같은 기간에 8.3명에서 4.3명으로 크게 줄었다. 정부가 중소기업에 연간 4조원의 연구개발비를 지원해도 개별 기업 입장에서는 항상 부족함을 호소할 수밖에 없다.

아베 총리가 비열하게 자행한 경제침략은 세계무역의 기본질서를 깨뜨리는 행위이며, 남북 화해 분위기에서 아베 정권이 배제되는 것에 대한 보복이라는 측면도 있다. 아베 일본 정부는 한국에 대한 무역보복뿐만 아니라 평화헌법 폐기와 재무장을 공언하고 동아시아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1990년대 군사정권이 억압해온 식민지배 청산 요구도 분출했으나 ‘정경분리’ 원칙까지 허물어지는 일은 없었다. 아베 신조 정부의 수출규제 조치는 이 금기를 깬 것이다. 한·일 갈등이 역사·영토 분야를 넘어 경제로까지, 그것도 일본의 선제공격에 의해 확대된 것은 한·일관계의 기본 틀이 효력을 상실했음을 확인한 사건이다.

세코 히로시게 경제산업상은 ‘한국에 수출된 전략물자의 일부가 북한에 넘어갔다’는 의혹까지 제기했는데, 이는 근거 없고 악의적인 의혹으로 보인다. 반면 아베는 ‘한국이 대법원 판결로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을 위반했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일본 정부가 수출규제 조치를 취하게 된 것은 한국이 당시 협정을 위반해 일본 기업들이 피해를 입게 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개인 배상청구권이 1965년 청구권협정으로 소멸됐다’는 아베와 달리 일본 사법부와 정부의 입장은 ‘국가 간 협정에도 불구하고 징용희생자 개인 배상청구권은 살아 있다’는 것에 가까웠다. 일례로 일본 최고재판소는 2007년 ‘중국 징용희생자들의 배상청구권이 살아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1991년 일본 외무성 야나이 지 조약국장은 참의원에 출석해 “한국 징용희생자들의 개인 배상청구권은 살아 있다”고 밝혔다. 고노 다로 외무상도 2018년 한국 징용희생자들의 배상청구권을 인정한 바 있다.

우쓰노미야 겐지 전 일본 변호사협회 회장 역시 ‘국가 간 청구권협정이 징용희생자들의 배상청구권을 없애지 못한다는 것이 국제법의 정신’이라는 점을 강조해왔다. 또한 전범기업들은 일정한 범위에서라도 징용희생자들과 배상 합의를 보려고 했지만, 아베 정부가 막는 탓에 나서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국 역시 징용희생자 배상 판결과 관련해 일본의 요구를 수용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돼버렸다. 그렇게 하는 순간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속국이라는 평가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됐기 때문이다. 일본은 수출규제를 발표하는 과정에서 모든 외교 통로를 차단하고 무조건 무릎을 꿇지 않으면 제재를 가하겠다는 식의 위협과 경고를 반복했다.

‘1965년 체제’는 한·일 관계를 규정하는 기본 틀이자, 냉전 시기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의 핵심 원칙이었다. 공산권체제를 봉쇄하기 위해, 미국은 6년간의 군정을 통해 전후 일본이 자유 민주국가로 다시 태어나는 기초를 세웠고,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일본의 주권을 회복시켜 줬다.

1965년 한·일 기본 조약은 한쪽 얼굴을 자신의 명분으로 내세운 두 나라가 맺은 조약이다. 당시 한국 경제 규모는 일본의 29분의 1에 북한의 종합 국력이 한국을 앞섰던 시대다. 이 상황에서 양국은 '합의할 수 있는 부분을 합의하고' 합의할 수 없는 부분은 저마다 해석이 가능하도록 회색(灰色) 지대로 남겨두고 회담을 타결했다.

'1910년 8월 22일 (한·일 병합조약)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과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는 기본 조약 제2조가 회색 지대다. 조약이 체결될 때 불법(不法)이었으므로 당초부터 무효란 해석과 체결 당시에는 국제적으로 인정받았으나 이제는 무효(無效)라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역사정의'란 역사적 사건에 대해 보편적 인권의 관점이나 정의의 관점에서 그 의미와 위상을 올바로 세우는 것이다. 이는 가해자가 피해자의 관점에 서서 진실을 대면하고 그 아픔을 보듬고 사죄하고 배상·보상하는 진지한 행위를 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민주화 시대를 거치면서 피해 당사자뿐만 아니라 많은 시민들이 한일청구권협정의 정당성, 그것이 묻은 역사정의의 문제들을 지속적으로 제기하여 왔다. 위안부 문제와 강제동원 문제 등을 보편적 인권의 관점과 더불어 국가 간 합의와는 구별되는 개인적 배상의 문제로 제기하고 쟁점화 하였다.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 이후 일본은 역사정의에 대한 지속적인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종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한일치유재단을 만드는 방식으로) 그것을 타협적으로 무마하는 방식의 대응을 해왔다.

박근혜 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타협적 해소의 전략을 취했고 강제동원 문제에 대해서는 사법부와의 거래를 통해 판결로서 이를 부정하고자 하는 전략을 취했다. 1965년 협정의 틀을 통해 모든 것을 부인하는 일본정부의 전략에 조응하여, 이를 그 틀 내에서 해결하고자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015년 11월 한일 정상회담을 갖고 12월 말 위안부 문제를 덜컥 합의해, 최종적ㆍ불가역적 해결’이란 문구로 인해 우리의 족쇄가 됐다. 2012년 일제 강제징용 피해 배상 대법원 판결을 뭉개왔던 사법부 판사들의 농단이 지난해 10월 대법원 확정 판결 후 일본에게 반발 빌미만 줬던 일이다.
노무현 정부 하에서도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해(1975년 정부가 1차 보상을 했음) 7천억 원의 추가 보상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단지 2005년 8월 민관 공동위원회의 발표 속에는 "일본군 위안부 등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와 사할린 동포, 원폭 피해자는 한일 청구권 협정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문구가 들어가 전향적인 단초를 제공하였다.

민주화시대의 전환점인 1987년으로부터 30년이 흐른 2016-2017년에 한국의 민중들은 촛불시민혁명으로 박근혜 정부를 탄핵했지만, 민주화 세대가 그 재정립을 위해 싸워왔던 역사정의의 문제를 새로운 지평으로 이동시킨 것이었다.

촛불시민혁명 이후 사법농단이 쟁점화 되고 대법원은 다시 한일청구권 협정이라고 하는 국가 간에 이루어진 협정임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시기 민중들의 피해에 대해 ‘개인적 배상이 가능하다’고 판시하게 이른 것이다. 이 외에도 1945년 '우키시마호 사건'의 진실규명을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대법원 판결은 1965년 협정이 상정한 한일 역사질서에도 균열을 내는 것이며, 더 나아가면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도 균열을 내는 것이기도 하다. 일본의 자폐적인 군국주의적 민족의식과는 더욱 괴리가 커지게 되어 아베정부로 하여금 위기의식을 갖게 했고, 이는 이전에는 사용하지 않던 무역보복 카드를 꺼내들게 했다.

한일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이 소멸됐는가 하는 문제는 법절차에 초점을 둔 쟁점이다. 이차대전 후 인권은 시간상으로는 과거사로, 공간상으로는 전 세계로, 내용상으로는 사회권과 연대권 영역으로 확대·순환되면서 발전해왔다. 따라서 이번 사태의 본질은 인간 자유의 세계사적 확장을 수용하느냐, 구시대적 아집을 고수하느냐 사이의 충돌에서 찾아야 한다. 노동권을 규정한 세계인권선언 23조는 전쟁 때 발생한 강제노동의 폐해를 반성하며 만들어졌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의 과오를 반성하고, 교과서에 낱낱이 기록해 교육시킬 뿐만 아니라, 아우슈비츠를 역사 기억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반면, 일본은 야스쿠니 신사에 전범들을 모셔놓고 기념일이 돌아올 때마다 참배하거나 공물을 바치고 있다. 이 극단의 대비가 주는 인지적 충격은 꽤 크다.

1970년 12월 현대 독일사의 결정적인 순간.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는 폴란드 바르샤바의 게토를 방문했을 때 무릎을 꿇고 나치의 전쟁 범죄를 인정하며 폴란드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했다. 미국 대통령이 베트남 국민에게, 일본 총리가 한국인과 중국인에게, 스탈린이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에게, 드골이 알제리인에게 무릎을 꿇고 사과한 적이 있었던가?’

바르샤바의 유대인 게토 봉기 기념탑 앞에서 브란트 총리가 무릎을 꿇고 사죄했던 광경을 많은 이가 기억한다. 그러나 당시 독일 국내의 보수 여론이 반발했던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홀로코스트를 둘러싼 역사 논쟁도 심했다. 처음부터 모든 독일인이 한목소리로 반성한 게 아니었다. 반세기 넘게 민주주의를 교육하고 삶의 모든 차원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하면서 새로운 세대를 꾸준히 양성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63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아우슈비츠 재판 이후부터 기류가 달라졌다. 독일 국민은 많은 유대인을 죽음으로 내몬 이가 지극히 평범한 인성의 소유자라는 데 충격을 받았다. 이 ‘악의 평범성’ 앞에서 비로소 책임은 몇몇 사람의 몫이 아니라는 자각이 싹텄다.

독일은 전후 재건에서 프랑스, 벨기에와의 국경지역에서 생산되는 석탄에 많이 의존했기 때문에, 프랑스와 먼저 화해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1949년 이후 미국이 신생국 이스라엘을 지지함으로써 독일이 1953년부터 대규모 배상 지급 프로그램을 시작하는 맥락이 되었다.

일본은 패전 이후 미국의 품에 안겨 아시아 대륙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오직 미국의 품에서 미국몽을 꾸다가 한국에 전쟁이 나자 잠시 일어나 미국의 손을 잡고 외화벌이를 해서 돌아왔다. 한일협정 때 한국이 받았다는 그 3억 달러에 해당하는 10년 할부 생산물과 용역보다 수십 배는 더 달콤했을 그 돈을 기반으로 일본은 다시 일어섰다. 그 뒤로는 경제성공의 신화가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반성할 이유가 없었고 요구받지도 않았다.

우리에게 가혹한 식민 지배에 대한 한(恨)이 DNA에 각인돼 있는 데다, 잊을 만하면 되풀이되는 일본 정치인의 망언(妄言)이 보태져 일본에 대해서만큼은 '실리를 위한 타협=굴욕·매국'이라는 게 일반적인 국민 정서다. 그냥 사과도 안 되고 '진정성 있는 사과'여야 한다.

2015년 위안부 합의 때 정부는 아베 정권에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최대치를 받아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0억 엔에 국가 자존심을 팔아먹었다'는 여론에 합의는 공중 분해됐다.

일본인은 한반도의 근대화 정책을 시혜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식민통치의 기법과 착취의 효율성 제고를 위한 시책이었다. 일본이 조선 땅에 새로운 제도와 문명을 들여온 것은 물론 한국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효율적인 식민 경영을 위해서였다. 보다 많은 식량을 가져가기 위해 척식회사를 만들고 그 관리를 위해 최소한의 교육을 한 것이다. 35년의 강점기에 한국 학교는 일본어로 가르쳐, 민족 정체성을 허용치 않는 교육을 한 것이다.

일본은 원자폭탄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는 자기연민에 허우적댈 뿐 원자폭탄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더 참혹한 사태가 벌어졌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솔직히 논의조차 하지 않는다.

일본의 근대는 경제적으로만 성공해, 국민은 어떤 위로부터의 부당한 힘에 한국민처럼 집단적으로 저항해 본 적이 없고, 일본의 민주주의는 정치적 리추얼로 변질돼 버렸다. 국가와 사회는 저리 돌아가도 오로지 자신의 삶에 장인적으로 몰두하는 우아한 개인주의로 도피해 버린 듯하다. 유럽 극우의 유대인 혐오가 있지만, 런던에서 혐 인도 시위, 파리에서 혐 알제리 시위 같은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는가.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며 발생한 현재 한일 관계의 긴장이 한국 대법원의 결정과 아베 정권의 대응으로 촉발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일본 내 오래된 혐한 세력이 그 뿌리이고 원인이다. 현재 더욱 극렬해지고 있는 일본 극우의 혐한 시위, 서점의 혐한 코너, 한국 학교에 대한 지원 중단 등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본의 과격한 반응을 보면 오히려 일본의 한국에 대한 콤플렉스가 참으로 크다.

세계적 자유무역 체인을 거스르고 자국과 이웃 나라, 동아시아를 넘어 다자 간 피해를 입힐 무리한 결정을 한 책임자와 자국의 패권적 욕망의 역사적 피해자인 이웃에게 혐오를 퍼붓는 저 끈질긴 야만과 증오의 세력을 도려낼 기회,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고립시킬 기회다.

한국의 촛불혁명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세계 최고 수준임을 보여주었고, 경제와 과학 기술 수준은 일본을 긴장하게 만들 정도로 발전했다. 많은 스포츠 스타가 세계 최고 무대에서 실력을 뽐내고, 문화 역시 '한류'라는 단어가 만들어질 만큼 성장하여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사실 글로벌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촛불시민혁명과 같이 민주주의가 한 단계 약진하고 그 속에서 역사정의에 대한 높은 인식의 단계로 나아가는 나라는 전 세계에 거의 대한민국 밖에 없다고도 이야기할 수 있다.

민주주의를 기준으로 보자면 일본이 그리 우등생은 아닌 것 같다. 세습 정치인도 많고 변변한 정권교체의 경험도 거의 없다. 견제와 균형보다는 일당독주라는 말이 더 어울려 보인다. 국경없는기자회가 발표한 올해 언론자유지수는 67위로 41위인 우리보다 한참 아래다. 민주주의는 우리가 아시아 최고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지난 2016~2017년 촛불혁명은 세계사에서도 유래를 찾기 어렵다.

우리나라는 스스로의 '닫힌 민족주의' 즉 우리만의 자폐성을 성찰하면서, 성숙한 역사정의 의식과 보편인권의 가치와 함께 가는 '열린 민족주의'로 가야 한다.

과거사 바로 세우기를 뚝심 있게 밀어붙이려면 성숙한 시민 역량이 뒷받침돼야 한다. 우리 시민사회는 굴곡진 근·현대 격동기를 현명하게 버티며 민주화를 이뤄냈고 촛불혁명이라는 경험을 통해 더욱 성숙해졌다. 올바르지 못한 가치관에 저항하고 역사 정의를 바로 잡을 힘을 충분하게 갖추게 된 것이다.

성숙한 시민 역량은 행동으로 분출되고 있다. 지난 14일 서울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7차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 기념집회엔 학생, 시민 등 2만여 명이 모여 일본 정부에 사죄와 배상을 촉구했다. 이날 함께 열린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는 꼭 1400회를 맞았다.

1992년 1월 8일 시작해 27년간 이어온 수요 집회는 잘못된 역사를 잊지 않고 바로 잡으려는 시민들의 의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광복절에 열린 촛불 집회엔 10만여 명(주최 측 추산)이 모여 일본 아베 정부를 규탄하기도 했다.

세계 시민과 연대도 이뤄내고 있다. 올해 수요 집회는 미국 일본 등 세계 12개국 37개 도시에서도 함께 열렸다. 일본 아이치현 국제예술제 아이치트리엔날레 2019에 전시한 평화의 소녀상이 일본 우익의 집요하고 거친 항의로 중단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해당 행사가 과거 외부 반발로 전시장에서 철거된 이력이 있는 작품을 모아 전시한 기획전이었다는 점에서 더욱더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하지만 일본 양심 세력이나 시민과 손을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했다. 기획전 실행위원들은 “소녀상 철거가 역사적 폭거”라며 반발했고 일본 작가들 모임인 펜클럽도 “정치적 압력”이라며 비판했다.

그 뿐이 아니다.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벌이고 일본 여행을 자제하면서도 조선통신사 같은 민간교류는 이어가는 시민의식을 발휘했다.

국산품 애용을 외쳤던 우리 사회가 국산이라는 말에 크게 개의치 않게 된 건 알 파치노가 삼성 애니콜에 정신 줄을 놓은 오션스13이 나왔던 2000년대 중반 무렵부터다. 우리 물건이 더 좋다는 자신감이 생기니 국산과 일제는 기호의 차이에 불과했다.

일본산 제품 불매운동은 최소 올 연말까지 간다. 일본의 수출규제로 촉발된 이 세태는 과거 몇 번의 불매운동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세게 진행 중이다. 아베 정부에는 선의를 기대할 수 없다.

지난 8월 14일 일본 제품 불매운동과 관련한 리얼미터 조사에서 가장 강경한 입장을 나타낸 연령층도 20대였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누가 봐도 의도적으로 한국을 무시하며 ‘선을 넘었다’는 점에서 참을 수 없다며, “부당하고 불공정한 대우는 못 참는다”였다.

일본이 경제보복을 철회해도 침략 사죄와 배상 때까지, 또는 그 이후에도 불매운동을 지속할 것이란 응답이 56.4%로 모든 연령대 중 유일하게 50%를 넘겼다. 감정적 대응 대신 그들의 생각을 쿨하게, 그러면서도 지속적으로 표출한다는 점에서다.

불매운동은 의류나 맥주, 화장품 등 대체 가능품이 있는 소비재에 한정되어 있다. 자동차도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 주력 산업의 목줄을 겨냥한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는 철회되어야 마땅하다. 아베 총리의 말처럼 신뢰가 무너졌다면 신뢰를 재구축하려는 노력부터 할 일이다.

소비자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정보를 주고받으며 치밀하게 불매운동을 전개 중이다. 여러 품목 가운데서도 패션 브랜드 유니클로와 아사히 등 맥주에 대한 소비자들의 거부감이 눈에 띄게 커졌다.

'국민교복'이라 불릴 만큼 남녀노소의 사랑을 받던 제조유통 일괄형(SPA) 유니클로가 불매운동의 대상이 되면서 전 지점 매출이 급감했다. 8개 신용카드사의 유니클로 매출액은 6월 마지막 주 59억 4000만원에서 7월 넷째 주 17억 7000만원으로 70%나 급감했다.

맥주도 ‘노 재팬’이 힘을 발휘한 품목이다. 특히 편의점 업계가 할인품목에서 일본맥주를 제외하고 발주조차 않는 등 ‘팔지 않는’ 불매(不賣) 운동의 대표 사례로 꼽힌다.

롯데그룹은 불매운동·반일감정에 가장 큰 영향을 받고 있는 기업이다. 일부 지분을 일본인이 가지고 있고, 유니클로·무인양품 등 일본 회사와 합작한 브랜드나 상품을 들여왔다. 쿠팡도 일본 기업 논란에 이름을 올려 곤혹을 치렀다. 손 마사요시(한국명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약 30억 달러 투자를 했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도 몇 차례 불매운동이 일어나긴 했지만 최근의 불매운동은 더 지능적이고 꼼꼼하게 이뤄지고 있다"며 "가치소비를 중시하는 젊은 층이 주도하고 있는 만큼, 이 같은 추세는 한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유니클로에 이어 일본 화장품 브랜드 DHC가 황당한 망언과 조롱을 연이어 쏟아내고 있다. DHC의 자회사인 'DHC텔레비전'은 지난 10일 한국의 일본 제품 불매운동과 관련해 "한국은 원래 금방 뜨거워지고 금방 식는 나라"라는 한 패널의 이야기를 여과 없이 내보냈다. 일본의 경제보복에 의해 촉발된 소비자 불매 운동의 배경과 과정을 무시한 채 평가절하 한 것이다.

여기에다 '일본이 한글을 만들었다'는 식의 역사 왜곡을 서슴지 않은 것은 물론 평화의 소녀상에 대해서도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로 폄하했다고 한다. 일본의 유명 만화 작가도 혐한 발언을 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시민들이 ‘탈덕’(팬이 좋아하는 것을 그만둠)과 불매 운동으로 비판에 나서고 있다.

우리 소비자들이 즉각적으로 '#잘가요DHC' 해시태그 캠페인을 시작하는 등 DHC 불매운동에 나선 것이다. DHC의 한국법인측은 13일 오후 뒤늦게 사과문을 공지했지만, 일본 본사인 DHC측의 공식적인 입장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한국 소비자들이 불매운동으로 대응하는 것은 단순히 말실수를 비난한 것이 아니다. 그런 말을 내뱉는 것은 평소 그들의 마음가짐이나 생각들이 그런 수준에 있기 때문이다. 부적절한 말을 쏟아낸다면 그 기업은 평소 사회적으로 부적절한 기업 윤리를 갖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당연히 소비자들은 이런 부적절한 기업이 생산하는 제품의 품질에 믿음을 가질 수가 없다.

정부는 이런 국민을 믿고 한·일 갈등 문제를 당당하게 풀어갔으면 한다. 과거처럼 미봉책이 아니라 역사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길 바란다. 비뚤어진 역사를 바로 세워 다음 세대에 전하는 일은 과거 세대에 대한 마음의 빚을 갚고 미래 세대에 짐을 덜어주는 일이다. 한·일 양국의 상호 발전을 위해서도 꼭 이뤄져야 할 일이다.

국민에게 기대지 말고, 선동적인 말로 감정을 자극해 국민을 앞세우지 말고 지금의 기형적인 시스템을 바로잡아야 한다. 어설픈 봉합을 시도해서도 안 된다. 표가 되지 않는다고 계산기를 다시 두드릴 요량이라면 시작하지도 말았어야 했다.

국가 간 싸움은 국력이 강한 나라가 아니라 국민의 지지를 받는 나라가 이기는 법이다. “좋은 위기를 낭비하지 마라”는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의 격언은 냉전 시대 국제정치 가이드라인으로 널리 인용됐다. 위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극복하느냐에 따라 오히려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는 현실적 충고다.

아베 총리가 일본 정부의 수출규제에 대해 한국 내 여론 분열을 계산했다는 정황들도 발견되며, 최근 국내의 정치적 갈등이 더욱 소모적으로 느껴진다. 한때 세계적 경제대국이자 문명화된 국가의 전범으로 여겨지던 일본과 그 정부의 일방적 조치에 대해 냉엄한 국제질서 속에서 엄정한 힘의 논리를 거스르지 말아야 한다는 식의 언론 양비론이다.

전쟁에서 '적전 분열'은 최악의 전략이다. 정작 일본은 아무 관심도 없는데 우리끼리 친일과 반일로 편 갈라 싸움하는 것은 제발 그만두어야 한다.

하지만 일부 보수 정당과 언론은 100년 전 '한일합방'을 외쳤던 사람들처럼 빨리 무릎을 꿇고 일본의 비위를 맞추는 것만이 우리의 살길이라고 은근히 국민을 겁준다. 이런 꼴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반민특위 실패로 친일 청산을 제대로 완수하지 못한 과거가 한스럽기만 하다.

보통은 자국의 안전과 평화를 위한 정치가 보수의 영역인데, 한국의 보수 일부는 “아베에게 사과하자”는 구호를 외친다. 정말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한국의 보수들은 좀 이상한 보수가 되었다. 도대체 성조기와 일장기가 어떻게 태극기와 같이 나올 수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가 어렵다.

병역을 면한 이유가 아무리 보아도 수상쩍은 자가 보수라며 설치고,  보수주의자 됨의 뜻도 모를 것 같은 자들이 보수적 견해라면서 무식한 이기주의를 드러내는 모습이 그렇다. 자기희생이나 공적 책임감 따위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상스러움이 보수의 탈을 쓰고 있는 것이다.

논쟁과 비평에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존재한다. 싸움의 언어 역시 최소한의 공유지를 벗어나선 곤란하다. 상대방의 존재를 근원부터 부정하는 치킨게임의 언어는 윤리적 차원을 넘어 그 언어가 도달하길 원하는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기도 어렵다.

일본을 이기고 일본에 지지 않기 위해서는 보복에 맞서 즉자적인 대응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상대방이 벌인 전쟁터에서 방어하는 데 그치면 전쟁은 이길 수 없다. 우리가 원하는 판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나라 우선주의로 일본에 맞서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아베 정부의 반 평화적이고 반 인권적인 무모한 무역보복에 맞서 평화와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수호해야 한다.

아베 정부의 ‘내셔널리즘’과 문재인 정부의 ‘극일’ 모두 비이성적이고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논조는 또 다른 예이다. 평화헌법의 근간을 이루는 헌법 제9조를 수정해 전쟁이 가능한 이른바 ‘정상국가’로 되돌리려는 역사수정주의자 아베의 경제보복 조치라는 변수와 동북아 질서의 변화에 대한 고려 없이 이를 현 정부의 외교실패로 규정하는 보수언론의 양비론은 위험하다.

첨예한 국제질서 속에서 내부의 위기를 외부의 갈등으로 전가해 전쟁 같은 위기상황을 조장하는 아베의 위험천만한 정치공학을 용인하는 부작용을 낳는다. ‘애국이냐 이적이냐의 양자 대립적 논의로 치환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그럴듯해 보이는 지적 또한 계산된 양비론에 다름 아니다. 무엇보다 지금은 작은 차이를 봉합하고 큰 뜻에 힘을 모아야 하는 준엄한 시점이다.

‘이젠 미래지향적으로 나아가자’는 대답도 판단을 회피하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위법행위를 허용하는 것이다. 그 구호는 수상쩍고 기만적일 수 있다. 공유할 수 있는 미래상이라면 공유하겠지만, 미래로 가기 위해서라도 먼저 청산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았는데,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기 위해 미래지향이라는 말을 해선 안 된다. 미래지향이라는 말을 하려면 제대로 죽지도 못한 채 망령처럼 떠도는 피해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아베정부의 무역보복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첫째는 아베정부를 제외한 일본의 많은 양심적 국민들과 시민사회, 나아가 중국 등 아시아 시민사회가 더 많이 공감하고 공유하게 하여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일본을 무찌르는 것이 아니라, 아베를 부끄럽게 하는 섬세한 전략이 필요하다.

둘째는 역사정의의 인식을 어떻게 한국의 민주화 '이후' 세대들이 더 많이 공감하고 공유하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강제동원이나 위안부 문제는 일제의 만행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반 인도주의적 범죄이며, 이제는 전쟁 성폭력, 여성인권, 반 인도주의적인 강제노동 등 보편적 인권의 문제로도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시민사회가 이렇게 놓아진 역사정의의 인식을 투철히 견지하되 그것을 근본주의적으로 관철하려 하기 보다는 동북아 각각의 나라가 갖고 있는 민족주의적 폐쇄성의 각기 다른 결을 섬세히 고려하면서 열린 선도자의 길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그것이 위법행위였다는 판단을 내려야 한다. 미래지향적 결과를 만들려면 먼저 과거를 판단하는 행위가 반드시 필요하다.

한일 경제전쟁에서 우리는 어떻게든 이겨낼 것 같다. 한국 산업구조 혁신, 촛불혁명 후 시민의식 재확인 같은 긍정적 효과도 예상된다. 하지만 상처뿐인 승리를 얻어낸 건 의병처럼 민초와 시민사회의 힘 덕분이다.

끝으로 도쿄올림픽 보이콧은 하지 말고 일본 아베 정권에 ‘유효타’ 꽂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할 시점이다. 후쿠시마 인근의 경기 개최와 성화 봉송, 선수촌 건설에 후쿠시마산 목재 사용, 선수촌 식당에 후쿠시마산 농수산물 제공 등 다른 참가국들도 우려를 표하고 있는 문제를 냉철하고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피폭 위험에 노출된 선수들의 안전과 건강을 더 큰 이슈로 부각시켜야 한다.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연장마감 시한이 24일이고 우리 군의 대규모 독도방어훈련도 예정돼 있다. 이 사안들의 처리 결과에 따라 한일관계가 또다시 분수령을 맞을 수도 있다.

GSOMIA는 일본을 압박하기 위한 카드인 만큼 정부는 18일까지도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GSOMIA를 연장할 경우 일본에 나약한 모습으로 비치면서 국내 여론이 나빠지고, 아베 정부와 우익세력에게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전략적 모호성’이 출구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도 돈다. GSOMIA를 파기할 경우 한국이 먼저 한·미·일 협력 구도를 깨는 모양새가 돼 일본의 역공을 부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물러설 공간을 남겨 두고 있다.

GSOMIA가 군사정보 교환을 의무로 규정하지 않고 있다는 데 착안하여, GSOMIA를 연장하되 정보 공유를 일시적으로 중단하면, 한·미·일 협력의 틀을 유지하면서 일본의 보복조치에 대응할 수도 있다.

극일(克日)·자강(自彊)을 바라며.
                2019. 8. 19    한상석 사회적협동조합연합회중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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