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10월 11일)로 한·일 갈등을 격화시킨 일본의 대한 수출규제 강화는 100일이 된다. 이는 ‘전화위복’이며, 정부가 소재·부품·장비 국산화를 통한 ‘극일(克日)’을 외쳤고, 정부 대책과 함께 기업이 앞장서 뛰며 위기를 헤쳐 나가면, ‘기술 자립’이 가능할 수도 있다.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은 중국의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보복 등에서 경험했듯이, 이웃 국가와 경쟁국의 견제와 압박을 이겨낼 기술자립이 그 어느 나라보다 절실하다. 

일본이 2011년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분쟁 당시 중국의 보복(희토류 수출 제한)을 이겨낸 것도 희토류 대체기술을 개발해 낸 덕분이다.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정부의 다짐을, 이번에 반드시 실현시켜야 한다.

지난해 10월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이후 일본의 대한 수출규제와 한국의 맞대응으로, 한일 관계가 1년 가까이 악화일로를 걸어왔다. 

아베 정부는 한국 정부가 한일협정으로 청구권이 소멸되었다는 ‘정부 간 합의를 어겼다’며, 7월 4일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소재 3개 품목에 대해 수출규제를 시작하고, 한국을 백색국가(수출절차우대국)에서 제외한 것이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유례없는 일이었다. 아베 정부는 한발 더 나아가 8월 28일엔 한국을 백색국가(전략물자수출심사 간소화 대상국)에서 제외했다.

아베 정부의 수출규제는 자유무역 원칙을 부정하고 세계무역기구(WTO) 규정을 위반하는 명백한 ‘경제보복’이다. 통상 문제와 관련이 없는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해 무역을 무기로 보복에 나선 것이다. 

한국 정부가 ‘삼권분립 원칙에 따라 법원 판결에 개입할 수 없다’는 객관적 사실을 일본은 무시했다. 법원 판결을 빌미로 한국에 경제보복을 가한 ‘일본이 민주주의 원칙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제기되며, 국제 여론이 아베 정부의 수출규제에 비판적이다. 

한국 정부는 일본의 조치가 부당한 경제보복일 뿐 아니라 ‘자유무역원칙에 어긋난다’고 보고 맞대응 차원에서, 8월 22일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을 종료하기로 결정했고, 9월 18일엔 일본을 백색국가에서 제외했으며,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했다. 

그간 일본 정부는 단 7건의 수출허가만 내줬고, 양국 교역은 급속히 위축되고 있다. 다급해진 기업들은 핵심소재 국산화와 수입선 다변화에 나서는 등 피해를 막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차제에 국내 산업의 ‘근본적인 체질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일본이 반도체 핵심 소재 3개 품목에 대해 수출 규제를 시행한지 이제 100일이 돼가는 사이, 우리가 가장 많이 수입하던 불산액은 단 한 건도 수출이 허가되지 않았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게 국내 기업들이 국산화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다.

반도체 회로를 깎아내고 불순물을 제거하는데, 꼭 필요한 고순도 불산액. 매달 일본에서 2천 톤 이상 들여오곤 했지만, 수출규제 이후 뚝 끊겼다.

극자외선용 감광액 등 다른 규제 품목은 그나마 7건의 개별 수출 허가가 났지만, 제일 많이 쓰이는 불산액에 대해선 일본 정부가 '서류 보완' 등을 이유로 한 건도 허가하지 않았다.

재고만으론 조업 중단까지 우려됐던 상황이지만, 결국 국산화로 해법을 찾았다. 업계 관계자는 "수출 규제 이전에 확보한 불산액을 아껴 쓴 덕에 아직 재고가 소진되지 않았고, 그 사이 국산화 작업에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고 있다"고 밝혔다.

국내 업체에서 만든 불산액이 품질 테스트를 통과해 이미 반도체 생산 공정에 투입되고 있으며, 새로 증설한 공장에서도 신제품을 생산해 역시 테스트가 진행 중"이라는 설명이다. 수입선 다변화를 위해 중국과 대만에서 수입한 고순도 불산액도 투입을 앞두고 있다.

현재 투입된 원재료가 반도체 완제품으로 만들어지는 석 달 정도가 지나면, 완전한 성공 여부가 확인될 것으로 보인다. 10월 7일 발표된 삼성전자의 3분기 실적도 일본의 수출규제 이후 반도체를 미리 사두려는 해외 IT기업들의 수요 때문에, 시장 예상보다 높게 나온 것으로 평가된다.

일본의 무역보복 후 당초 우려했던 반도체 생산 차질 등이 나타나지 않았고, 이번 일을 계기로 국내에서 핵심 부품의 자력 생산 틀을 갖추자는 ‘자강 분위기’가 생겨난 것은 나쁘지 않다. 

양국의 피해 양상은 당초 일본의 계산과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한국의 반도체 생산에는 차질이 없는 반면, 일본은 한국인 관광객 급감 등으로 피해를 입고 있다. 일본도 한일 교류 단절과 일제 불매운동 등으로 ‘약 3,500억 원의 생산 차질을 빚었다’는 추산이 나온다.

지난 100일을 돌아보면, 아베 정부의 수출규제로 인한 피해는 한국보다 오히려 일본 쪽이 더 컸다. 아베 정부의 부당한 경제보복이 우리 국민의 ‘불매운동’에 불을 붙여, 관광 분야 등 일본의 관련 산업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무리한 수출규제가 ‘제 발등을 찍는 자해행위가 될 것’이라는 경고가 현실이다.

우리 정부는 문재인 대통령의 8·15 경축사를 비롯해, 그동안 여러 차례 외교적 대화를 통한 사태 해결을 일본에 요청했다. 그러나 아베 정부는 태도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10월 8일 국무회의에서 “정부와 기업의 신속하고 전 방위적인 대응, 국민의 응원까지 모여 잘 대처해왔다”며, 국무위원들을 격려했다.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은 “일본의 수출규제가 직접적으로 한국경제에 가져온 피해는 하나도 확인된 바가 없다”고 단언했다. 외려 일본산 불매운동과 관광객 급감 여파로 일본 기업과 지역경제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일본도 경제보복이 자충수였음을 자각했을 것이다.

아베 정부가 지난 7월 초 수출규제 조처를 발표하자, 한국의 보수언론들은 마치 한국 경제가 망할 것처럼 보도했다. ‘반도체 공장이 한 달 안에 멈춰 서고, 국내 기업의 피해가 일본의 300배를 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베 정부가 수출규제에 이어 금융보복에 나서면 ‘제2의 외환위기’를 맞게 될 것이라고도 했다.

아베 정부의 수출규제로 ‘우리 기업이 직접적 피해를 봤다’는 보고는 아직까지 한건도 없다. 물론 여전히 불확실성이 크다. 아베 정부가 또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긴장의 끈을 놓지 말고,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망외의 소득도 생겼다. 우리 정부와 기업들은 소재·부품·장비산업의 지나친 대외 의존도가 부를 수 있는 위험을 깨달았다. 그동안 추진해 온 정책의 문제점을 찾아내고, 보완하는 계기가 됐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협력 분위기도 조성되고 있다. 반도체 소재의 국산화 성공 사례들도 들려온다.

반면 아베 정부가 무역보복으로 수입규제가 아닌 수출규제를 하다 보니 일본 기업들의 불만이 크다. 일본의 7~8월 한국 수출이 전년 동기 대비 8.1% 감소했다. 한국의 일본 수출 감소율 3.5%의 두 배가 넘는다. ‘자승자박’인 셈이다. 일본 기업들은 우회수출 등으로 수출규제를 피해 가고 있다. 주요 고객인 한국 기업들을 놓치지 않으려는 일종의 자구책이다.

일본정부관광국(JNTO) 통계를 보면, 일본을 찾은 한국 관광객이 7월에 전년 동월 대비 7.6%, 8월엔 48% 감소했다. 8월 통계가 나온 9월 19일 일본의 주요 신문들이 1면 머리기사로 다뤘다. 그만큼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얘기다. 

‘메이드 인 재팬’의 상징인 일본 승용차의 9월 한국 판매는 60% 감소했다. 수입차 시장 점유율이 1년 새 15.9%에서 5.5%로 축소됐다. 일본 맥주의 9월 수입액은 6천 달러(약 700만원)로 99.9% 감소했다. 사실상 수입이 중단된 셈이다.

10월 6일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한경연)이 공개한 2019년 여름 휴가철(7∼8월) 한일 여행의 경제적 영향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양국 관광교류 위축에 따른 일본의 생산유발 감소액은 3537억 원에 달한다. 이는 같은 기간 한국의 생산유발 감소액 399억 원의 9배 이상에 달하는 규모다. 

대표적인 수입 품목인 일본산 맥주와 일본 차량 판매는 눈에 띄게 줄었고, 한 일본 의류 업체는 한국 시장에서 철수를 결정하기도 했다. 반면 온라인을 통해 일본 제품을 구매하는 이른바 '샤이 재팬' 현상도 감지되고 있다.

일본 내 5위권의 패션대기업 한국지사가 운영하는 서울 강남의 한 골프 의류 매장은 70% 할인 행사를 벌이며 재고 소진에 나섰다. 내년 2월까지 한국 시장에서 완전히 철수하기로 했다는데, 일본 본사는 '한일 간의 경제마찰 격화' 때문이라고 철수이유를 설명했다.

일본산 맥주에 대한 불매 열기는 오히려 더 뜨거워지고 있다. 한 편의점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수입맥주 매출비중 가운데 가장 높은 30%를 차지했지만, 지난 8월엔 2.8%, 9월엔 1.5%까지 추락하며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토요타와 혼다, 닛산 등 일본 수입차 역시 1년 전과 비교해 판매 실적이 많게는 90% 가까이 줄었다. 

불매운동 열기 자체는 처음보다 다소 줄어든 모습이지만, 일본산 제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인식이 변하면서 떨어진 브랜드이미지까지 살아나기는 당분간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혐한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키며 사실상 오프라인 판매망이 차단된 DHC. 최근엔 온라인에서 가격을 크게 낮춰 판매를 이어가고 있다.

대표적인 불매대상이었던 유니클로의 경우 최근엔 겨울시즌 일부 제품이 오프라인 매장에서 완판 되는 일도 있었고, 회사 측도 매장보다 온라인 주문 고객이 더 많은 건 사실이라고 밝혔다.

아베 정부가 수출규제를 발표했을 때, 오랜 시간 치밀한 준비 끝에 나온 것이라는 관측이 있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많이 부풀려진 것 같다. 아베 정부는 일본 내 ‘반한 감정’을 등에 업고 무역을 무기로 국내 정치와 외교 문제를 풀려고 했다. 무리수였다. 

반도체 소재 수출을 중단하면, 한국이 바로 두 손 들고 나올 것으로 판단한 듯하다. 잘못된 정보를 입력받은 것 같다. 처음부터 스텝이 꼬일 수밖에 없었다.

수입규제가 아닌 수출규제로 무역보복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미-중 무역 분쟁의 핵심도 관세와 환율을 통한 수입규제다. 그런데도 아베 정부는 엉뚱하게 수출규제를 들이밀었다. 

수출규제는 상대국뿐 아니라 글로벌 공급 망까지 흔든다. 한국의 반도체 생산이 차질을 빚으면 세계 전자산업이 대혼란에 빠진다. 미국과 유럽의 주요 언론들이 “가망 없는 무역전쟁을 중단하라”고, 아베 정부에 경고한 이유다.

또한 아베 정부가 한국을 너무 얕잡아 봤다. 일본의 경제력이 한국을 앞서는 게 사실이지만, 한국 경제도 그동안 급속히 성장했다. 더 이상 일본에 호락호락 당할 상대가 아니다.

그리고 우리 국민의 단호하면서도 성숙한 대응이 아베 정부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불매운동 초기 아베 정부는 “이번에도 얼마 못 갈 것”이라고 폄하했다. 과거와 달리 이렇게까지 확산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럼에도 한-일 관계가 이대로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한국과 일본은 그동안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점을 활용한 분업과 협업으로 ‘윈-윈’을 해왔다. 양국 관계 악화는 모두 손해다. 일본의 양심적 시민사회뿐 아니라 보수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한국과 함께 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10월 10일 전직 총리·장관·대사·국회의원·종교인·학자 등 각계 원로 105명은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아베 신조 일본 정권이 부당한 무역 규제를 철폐하고, 한반도 정책을 전환할 것을 촉구했다. 

이들은 한국어와 일본어로 발표한 성명에서, 일본 아베 정권에 △부당한 무역규제를 철폐하고, 한반도 적대시 정책을 전환할 것 △‘65년 체제’의 불안정성을 인정하고, 시정에 나설 것 △일본이 핵무기에 의한 최초·최대 피해자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엄숙히 받아들여, 평화헌법 체제를 지켜갈 것 △한국과 함께 북한의 비핵화를 견인하고, 동아시아를 비핵무기지대로 만들 것 △북한과 오랜 비정상관계를 최종적으로 청산할 것 등을 요구했다.

이들은 한국 대법원의 강제동원 배상 판결이 ‘국제법 위반’이라는 아베 정권의 주장에 대해, ”청구권협정은 한일 간 재산 및 청구권에 대한 정치적 타결을 이룬 것에 불과해 불법적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이 포함되지 않았으며, 식민지주의가 남긴 과거와 현재의 피해는 소급하여 비난받아야 하며, 재발이 방지되어야 한다는 더반선언(2001년)이 나오는 등 국제사회의 식민지 지배 책임 인식은 큰 진전을 이루고 있는데,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 이와도 궤를 같이 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아울러 일본이 “식민지배가 정치적, 군사적 배경 아래 한국 사람들의 뜻에 반해 이뤄진 것”이라며, 식민지배의 강제성을 인정한 2010년 간 나오토 총리의 담화를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일본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아베 총리의 대한국 정책을 비판한 ‘한국은 적인가’ 성명에 1만 명 가까이가 지지 서명을 한데 이어, 이번 한국 원로들의 성명이 나왔다. 한·일 지식인이 연대해 ‘동아시아 평화 이니셔티브’를 만들자는 제안도 논의되고 있다. 

두개의 변곡점이 다가오고 있다. 10월 22일 나루히토 일왕 즉위식과 11월 22일 GSOMIA 종료일이다. 우리 정부가 지렛대로 활용할 기회다. 원칙을 지키되 외교적 협상력을 높일 때다.

때마침 양국 정치권에서 한발씩 양보한 타협안을 모색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려온다. 그런 점에서 10월 22일 열리는 일왕 즉위식은 외교 갈등을 풀어나가는 기회로 삼을 만하다. 

이런 상황에서 수출규제 문제를 다룰 세계무역기구 첫 절차인 한-일 국장급 양자협의가 10월 11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다. 일반적으로 양자협의는 과장급으로 이뤄지는데, 양국이 사전 논의 과정에서 국장급으로 격상했다고 한다. 수출규제 이후 첫 통상 분야 고위급 만남인 만큼 생산적인 논의가 진행되기를 바란다.

또 10월 22일 나루히토 일왕 즉위식에 이낙연 국무총리가 우리 정부 대표로 참석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 총리는 국회 한일의원연맹 수석부회장을 지내는 등 정부 내 대표적인 일본통이다. 이 총리와 아베 총리의 만남이 이뤄지면, 사태 해결을 위한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루히토 즉위식을 앞두고 일본 국민은 열광하고 있다. 일본 왕실이 과거에는 군국주의의 상징이었지만, 지금은 일본 통합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일본의 국정은 총리와 내각이 집행하고, 왕은 상징적 존재라는 점에서, 관계 정상화 문제는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신조 총리의 책임이다. 그러나 일왕은 훌륭한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다. 

나루히토 왕은 한국을 ‘조상국가’로 생각할 정도로 매우 우호적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부친인 아키히토 전왕은 지난 2001년 백제 무령왕의 후손임을 밝히면서 “한국과의 연(緣)을 느낀다”고 밝힌 바 있는데, 나루히토 왕은 부친이 그런 발언만 하고 한국 방문을 하지 못한 데 대해, ‘매우 아쉽다’는 생각을 주변 인사들에게 밝힌 적이 있다. 또 이 총리와는 구면이다. 

2018년 3월 브라질에서 열린 세계 물 포럼 때 왕세자 신분으로 참석해 이 총리와 환담한 적이 있는 데, 당시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과거를 반성하고 앞으로 좋은 관계가 만들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일왕 즉위식은 일본의 국가적 경사이고 이웃으로서 축하할 일이다. 1990년 아키히토 전 일왕 즉위식 때도 강영훈 총리가 축하사절로 갔다. 

이 총리는 일본이 경제보복을 철회한다면, GSOMIA 종료를 재검토하겠다고 수차례 밝혔다. 니카이 도시히로 자민당 간사장은 “일본이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아베 총리는 최근에도 국회에서 “한국이 국가 간 약속을 지켜야 한다”거나, “관계 회복을 위해서는 한국이 먼저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일 갈등을 풀려는 태도가 아니다. 

한국과 일본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로 공동 번영을 위해 노력해야 할 숙명적 관계에 있다. 비단 두 나라뿐 아니라 동북아시아 평화를 위해서도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 소모적 갈등을 계속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자해지’ 차원에서 일본의 전향적인 태도 변화가 필요하며, 수출규제 철회가 그 첫걸음이 되어야 한다.

자민당 간사장을 포함해 일본 여당 의원들이 일본의 수출규제 철회를 염두에 두고, “일본이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 한일 의원연맹에서는 수출규제 해제와 GSOMIA 종료 결정 재검토 동시 실행으로 갈등을 풀어가는 방안도 모색하고 있다. 

고노 다로 일본 방위상은 11월 열리는 아세안 확대 국방장관회의 때 정경두 국방장관과 회담할 수 있다는 뜻을 밝혔다. 미국을 방문 중인 이도훈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은 한·미·일 북핵수석대표 회동 때 다키자키 시게키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과 따로 만나 대북정책 등을 협의했다. 외교가에서는 한·일 간 외교채널을 통해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문제 등 현안에 관한 물밑대화가 상당 수준까지 진전됐다는 관측이 나온다.

그러나 일본은 최근 발간된 방위백서에서 ‘유사시 독도 상공에 자위대 전투기를 긴급 발진시킬 수 있다’는 입장을 처음으로 시사했다. 야스쿠니신사에 전범을 모시면서 국가의 상징으로서 참배하고, 역사에 전혀 반성을 하지 않으면서, 지배층이 계속 극우적 사고방식을 고집하는 일본의 상황은 1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 상황과 유사한 조건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패배 후 독일은 전쟁세력이 철저히 제압되고 해체됐지만, 일본은 호전적 극우세력이 전혀 제압되지 않았다. 일본은 조건만 갖춰지면 히틀러 나치처럼, 언제든 전쟁을 일으킬 '의지'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지금 그러한 조건이 구축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군국주의 방향이 크게 좌절을 겪지 않는 한 그리고 과거 역사에 대한 진정한 반성을 하지 않는 한, 한국과 일본 양국 간에 건강한 관계가 이뤄지기는 어렵다. 그리고 일본의 군국주의 방향은 곧 한국으로 향하는 것은 필연적 수순이다.

일본은 '통일 한국'이 일본에 비우호적일 뿐만 아니라 중국 및 러시아 그리고 미국과의 '균형외교'를 통해 국제적 위상이 급격히 제고되는 반면 자신들의 위상은 크게 하락될 가능성을 대단히 우려한다. 더 이상 현 국면을 방치해서는 자신들이 이대로 '국외자'로서 철저하게 주변화 돼버릴 수 있다고 인식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 이제 자신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남북 접근을 제어하고 어떻게든 분열된 한반도의 현 상황 유지를 추구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한국의 국력, 특히 경제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판단이다.

이것이 일본이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에 나설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필연적 논리요 수순이다. 일본의 경제보복은 나아가 전후(戰後) 질서에 의해 강제됐던 '평화 국가'의 틀을 벗어버리고, 이제 명실상부한 '정상 국가'로서 동아시아의 맹주가 되겠다는 선언이다. 

과거 '욱일기'를 휘날리며,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했던 '군국주의 일본제국'을 오늘 화려하게 부활시키겠다는 그들만의 꿈이다. 물론 시대착오적이며 실현 불가능한 '몽상'이다.

비판 대상은 아베 정권이어야 하며, 일본 시민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반미운동이나 미국에 대한 비판을 할 때, '미국 시민'을 별도로 분리해 논의한 적은 거의 없었다. 

일반적으로 한 국가의 외교 정책에 그 국민들은 대부분 지지하고 추종하는 경향이 높다. 특히 일본의 경우에는 그러한 경향이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일본 전체 시민들의 진지한 각성이 필요한 상황이다.

우선 도쿄올림픽 욱일기 응원이나 후쿠시마 오염수 해양방류에 대해 남과 북이 힘을 합쳐 대응하는 것은 향후 보다 확대, 심화된 남북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좋은 방안이다. 

그런데 일본이 과학 분야 24번째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첨단 소재 강국의 면모를 과시하는 이웃나라를 보면서 4차 산업 혁명기를 맞은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된다.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자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R&D) 투자 비중 세계 1위지만, 노벨상 시즌이 찾아올 때마다 ‘혹시나’ 하는 기대조차 갖기 어려운 형편이다. 

미국과 일본은 연구 성과를 기다리는 편이지만, 우리는 단기적인 성과나 논문 양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하다. 지난 7월부터 진행 중인 일본의 한국에 대한 무역보복은 이 같은 기초과학의 우수성을 이용한 결과이기에, 참으로 부럽지만 두렵기도 하다. 

일본은 역대 노벨상 수상자 비중이 세계에서 다섯 번째 이른다. 그동안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1건밖에 수상하지 못한 한국의 현실이 새삼 대비된다. 

일본 국적자와 일본 출신으로 다른 나라의 국적을 보유한 수상자를 합치면 노벨상 수상은 28명이다. 일본은 화학상 수상자만도 8명이며, 물리학상은 9명, 생리의학상 5명, 평화상 1명, 그 타기 힘들다는 문학상도 2명(가와바타 야스나리, 오에 겐자부로)을 배출했다.

요시노 아키라(71·吉野彰)씨가 9일 노벨 화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자, 일본 방송들은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요시노 수상자에 대한 소개와 수상 의미를 전하는 보도를 했다. 신문들은 ‘호외’를 제작해 거리에서 배포하는 등 흥분했다. 아베 총리는 "일본인으로서 자랑으로 생각한다"고 떠들었다.

지난해에는 혼조 다스쿠(本庶佑·77) 교토대 특별교수가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는 등 2015년 이후 거의 매년 되풀이되는 노벨상 경사다. 2019년 노벨화학상 공동수상자 요시노 수상으로 일본은 과학부문(생리의학·물리·화학)에서만 24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는데, 미국 다음으로 많이 배출한 국가다.

물론 일본의 이 같은 기초과학 강국의 위상이 하루아침에 이뤄진 건 아니다. 우리보다 먼저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의 100년 내공이 스며든 결과라면, 스포츠 한·일전처럼 단숨에 따라잡겠다고 조바심만 낼 게 아니라, 연구 인프라의 저변을 넓히는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리튬이온 배터리 발전 공로로 화학자인 요시노 아키라는 공동 수상자인 존 구디너프(미국)와 스탠리 휘팅엄(영국)이 만든 리튬이온 배터리의 원형을 상용화해, 요즘처럼 휴대전화 등 온갖 전자기기를 돌리는 전지로 발전시켰다. 

요시노 수상자는 일본 화학기업(아사히카세이)에서 연구에 매진하다 발표한 업적으로 노벨상을 탄 것이다. 전기자동차가 성장을 견인할 리튬이온전지 세계시장 규모는 2022년 약 80조원으로, 2017년과 비교해 2.3배 성장할 것으로 예측됐다.

그는 종합화학에 특화된 중견기업 아사히카세이에 1972년 입사해 연구에 매진해 왔다. 기자회견에서 “1981년 (리튬이온전지) 개발에 관한 기초연구를 시작했고 실제로 개발될 때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며, “개발한 리튬이온전지는 3년간 전혀 팔리지 않았다”고도 말했다. 

다년간에 걸친 연구 시행착오를 긴 호흡으로 용인하는 일본 기업과 대학의 연구 환경을 짐작케 한다. 단기간에 성과가 나오지 않는 연구프로젝트를 ‘중견기업에서 진행했다’는 점이 일본 기초과학의 저력을 보여 주는 요소이다.

세계 최고 수준인 일본 기초과학은 ‘제조업 강국 일본’의 뿌리다. 일본은 소재·부품 분야의 압도적인 우위를 바탕으로 제조업은 물론 첨단 산업에서 높은 경쟁력을 발휘하고 있다. 

한국연구재단이 최근 10년간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에 기여한 핵심 논문을 조사한 결과 수상자 평균 연령은 57세였다. 핵심 논문 생산에는 평균 17.1년이 걸리고, 생산 후 수상까지 평균 14.1년이 소요되는 것으로 조사됐다. 노벨상 수상까지 총 31.2년의 세월이 필요한 셈이다. 

과학기술 분야 노벨상은 인류의 시야를 넓힌 새로운 발견이나 기술에 주어진다. 그 발견과 기술이 사실로 입증되고 인간 생활에 실제 영향을 주기까지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메이지유신 뒤 젊은 과학자를 유학 보내고, 1917년 아시아 최초의 기초과학 종합연구소인 이화학연구소(RIKEN)를 설립한 일본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축적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러려면 한 분야에 천착한 과학자는 물론 연구를 지원할 사회적 시스템이 반드시 정착돼 있어야 한다.

정부와 과학기술계가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집중 연구에 들어간 게 불과 10여 년 전이다. 연구비 나눠먹기가 성행하고 단기 실적을 중시하는 풍토 탓에 과학자가 한 분야에 몰입하기도 쉽지 않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가 정작 선망해야 할 것은 일본 사회의 연구 환경이다. 학계뿐만 아니라, 정부와 기업에서 과학기술자를 존중하는 사회적 풍토를 ‘벤치마킹할 만하다’는 얘기다. 

정책도 기초기술보다는 당장 물건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실용기술을 개발하는 데 맞춰져 있다. 기업은 물론 정부의 연구 정책이 순수과학으로 눈 돌리기 시작한 시간도 너무 짧다. 

기초과학 연구자금을 지원하는 한국과학재단이 설립된 게 1977년이다. 실질적인 연구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창의적 연구진흥사업’은 1996년에야 시작했다. 기초과학 종합연구기관인 기초과학연구원(IBS)은 2011년에야 만들어졌다. 

문재인 정부는 올해 '수소경제 활성화 로드맵'을 발표했다. 그러나 최근 국감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수소생산기술은 선진국 대비 60~70% 수준으로 드러났다. 말로는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하겠다며, 이에 필요한 기초과학기술은 확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한국연구재단은 부실 학술지에 게재된 한국 논문이 171개 국가 중에서 1위라고 10월 9일 밝혔다. 부실 논문이 증가한다는 것은, 연구 부정이 만연해 있다는 사실과 맥을 한다. 논문 편수 같은 연구 성과 보여주기에 급급한 것은 지난 1998년 도입된 학술지 등재제도와 무관하지 않다.

단기 과제에 집중하고 실패를 용인하지 않으면서, 매년 5만개가 넘는 정부 R&D 과제 성공률이 98%라는 비상식적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공무원이 실적 중심으로 하는, R&D 예산 배정과 평가 방안을 뜯어고쳐, 기초과학을 키워야 한다. 정권이 바뀌어도 해당 연구가 지속될 수 있는 토대 또한 마련돼야 한다.

그나마 정권이 마련한 연구 사업을 다음 정권이 들어서면 인력을 줄이고, 분야를 바꾸는 식으로 연구자들 의욕을 꺾어 왔다. 

한국은 빠른 성장을 위해 당장 돈이 되는 분야인 응용과학에 집중해 왔다. 이런 추격형 발전전략은 이제 한계에 달해, 선도형 발전전략이 요구되고 있다. 정부도 이를 인식, 많은 돈을 연구개발(R&D)에 투자하고 있다. 

이런 환경과 풍토에선 아무리 우수한 연구자라도 살아남기 힘들다. 정부와 기업, 국민의 인식이 확 바뀌어야 하는 이유다. 지금 노벨상을 기다리는 건, ‘나무 밑에서 입 벌리고 감 떨어지길 기다리는 격’이다. 하지만 감이 떨어질 나무조차 제대로 못 키우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이래선 노벨상 한·일전 승리는 고사하고, 미래 산업을 일구는 데도 역부족이다. 지금처럼 최 단기간 내 성과를 압박하는 정부의 연구개발(R&D) 지원 방식이나 지나치게 실용화에만 치우친 산학협력 체계부터, 글로벌 기준으로 혁신할 때다.

일부 중앙 신문사들이 대학의 연구 평가 척도로 네이처와 사이언스 등 세계 유명 논문에 많이 실리는 것보다는, 양적 연구(논문 개수)에 집착해 서열을 매기는 실태도 문제다.

정부와 대기업들이 노벨상을 배출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복수의 고등 연구 클러스터(집적지)를 만들어, 해외 클러스터와 연결하는 것도 중요하다. 무엇보다 이공계 학자들과 의학도들이 소명과 투지를 가지고, 새로운 길에 도전하는 것이다. 정부와 기업들은 이들을 지원해야 한다.

무역 전쟁처럼 일본과 무슨 대결을 벌일 때마다 일본을 이기자면서도, 제대로 된 노벨상 한 명 없는 이 슬픈 현실에 대해, 지도자들은 뭐라고 변명할지 모르겠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주요 과학·기술지표에 따르면, 2017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지출 비율은 한국이 4.55%로 이스라엘(4.54%)을 제치고 1위다. 2013년부터 이스라엘과 1, 2위를 다투고 있다. 내년 R&D 예산도 24조원으로 전체 예산의 4.7%이다.

우리의 현실은 거리가 멀다. 교육과 문화, 정책이 모두 실용 일변도다. 교육은 당장 대입에 도움이 될 국·영·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어린 학생이 창의적 생각을 하고, 그것을 발전시킬 여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꾸준한 연구보다는 당장 쓸 수 있는 기술을 연구하는 데 매달리고 있다. 미국과 일본 같은 선진국을 따라 배우며 생산기술 발전에만 매달려 온 한국식 발전 모델의 한계다.

가장 뛰어난 학생들이 세계적인 석학의 꿈을 버리고 의대를 진학하는 한국의 풍토, 특히 카이스트와 서울대 공대 등을 지원했다가 의전원으로 편입하는 한국이 노벨상 수상자를 낼 수 있을지 자못 걱정이다. 


2019. 10. 11.
사회적협동조합연합회중앙회 회장 한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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