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피 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 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는 학생 탑에 쓰였던 글귀다. 학창시절 6년간 쳐다보며, 바른 길만을 추구하려는 혼을 받들어 살아왔다.

민족차별, 식민지교육에 저항해 일어난 학생독립운동이 90번째 기념일을 맞았다.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시작돼 이듬해 3월까지 전국 학생들의 시위로 번진 학생독립운동은 3·1 운동, 6·10 만세운동과 함께 일제강점기 3대 독립운동으로 꼽힌다.

그러나 학생이 중심세력으로 등장한 사회문화운동의 효시라는 역사성, 3·1 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이라는 시기적 의미에도, 학생독립운동은 기념과 기억의 대상으로 응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11월 3일 광주시 동구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광장에서 ‘함께한 역사, 함께할 미래’를 주제로 일제에 맞선 학생들의 항일정신을 기리는 학생독립운동 90돌 기념식을 열었다.

학생독립운동은 1929년 10월 30일 일본인 학생들이 나주역사에서 조선여학생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하고도, “조선인 주제에”라고 모욕을 준 사건으로 촉발됐다. 광주지역 학생들은 11월 3일 시내 일원에 진출해 ‘차별철폐와 일제타도’를 외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당시 11월 3일은 일본으로서는 4대절의 하나인 명치절이었고, 우리나라는 마침 음력 10월 3일로 개천절이었으며, 광주학생 독서회원들에게는 전신인 성진회 창립 세 돌이 되는 날이었다.

광주시교육청이 2006년 역사학계의 검토를 거쳐 작성한 명단에 따르면, 1929년 당시 북한 지역 133곳을 포함해 전국적으로 320개 학교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지역별로 전라(41개), 서울·경기(56개), 경상(40개), 충청(23개) 등이었으며, 평안(64개), 함경(53개) 등에서도 참여가 활발했다. 광주만의 사건이 아닌 전국적인 '들불'이었다는 방증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 알리는 카드뉴스[서경덕 교수 제공]
광주학생독립운동 알리는 카드뉴스[서경덕 교수 제공]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을 비롯해 중국 공산당기관지 '홍기', 국민당 기관지 '중앙일보', 독일 '포시쉐 차이퉁', 소련 공산당기관지 '프라우드' 등 각국 언론에서도 당시 학생들의 외침을 보도했다.

과제는 참가학교 등과 관련한 체계적인 조사연구도 시급하다. 초등교과서에는 학생독립운동 관련 설명이 없으며, 중등교과서에는 학생독립운동 참여 학교를 194개로 서술하고 있다. (194개 학교 참여는) 조선총독부 자료를 인용한 잘못된 내용이라 320개 학교로 바로 잡고, 광범위한 정부 학술조사를 통해 교과서에 학생독립운동을 정확하고 상세히 기술해야 한다.

학생독립운동에는 전국적으로 5만 4천여 명이 참여해, 1천 600여명이 일본 검·경에 붙잡혀 광주에서만 170여명이 실형을 선고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1,000여 명이 되는 광주고보·광주농업학교·광주여고보·광주사범학교 등 광주 시내 중학교 학생 대부분이 항쟁에 참여하였는데, 일제는 이 가운데 170여 명을 광주형무소에 투옥시켜 공판에 회부하였다. 광주고보의 검속학생 총수는 12월 17일까지 247명이며, 그 중 55명은 구속, 192명은 석방되었다.

퇴학 582명, 무기정학 2천 330명, 강제 전학 298명 등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전국 수천 명의 학생이 일제의 탄압을 받았지만,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사람은 327명에 불과하다. 그나마 정부가 적극적으로 서훈자 발굴에 나서면서, 최근 1년 사이에 추가된 인원이 75명이다. 퇴학자 명단 등 자료를 수집하고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인사도 공훈을 인정하는 등 서훈자를 적극적으로 발굴해야 한다.

현재 정부가 선정한 독립유공자는 모두 1만 4879명인데, 광주학생독립운동 관련 훈포장 수여자는 212명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 동지회 회원 227명 중에서도 훈포장을 받은 인물은 69명에 그쳤다.

또 기념사업 활성화를 위해서는 박제화된 기념식에서 벗어나 다양성을 구현해야 한다는 요구도 크다.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사업회는 2017년 발표한 100주년 비전에서 '학생독립운동 참여학교' 표지판 게시, 이달의 학생독립운동가 선정, 보훈대상자 발굴, 참여 학교 연대합동기념식, 청소년 공모, 기념 예술창작물 제작 등을 제안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학생들이 독립운동의 선두에서 주도적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한 거족적인 항일운동이었다는 점과, 1930년대 독립운동의 연결고리로 작용하여 거대한 독립운동사의 물줄기를 면면히 이어왔다는 점에서 그 위상은 매우 높다.

조선학생들에게 식민지학생으로서 분노와 저항의식을 표출하는 것은, 이미 성진회와 소녀회라는 독서회를 조직하여 식민지교육의 모순과 민족차별을 각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1920년대는 사회주의의 전파와 영향으로 민족주의 계열의 애국지사들만이 아니라, 사회주의 계열의 애국지사들이 국내외에서 다양한 독립활동을 전개한 것이다.

중학교 역사교과서는 300자 이내로 기술되어 있고, 고등학교 한국사교과서는 287자에서 587자로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관련된 사진과 자료가 제시되어 있어 실제 분량은 반쪽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현재 교과서에서는 ‘광주학생항일운동’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부르고 있어, 학생들이 이해하는데 혼란을 느끼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은 넓은 의미에서 ‘항일’ 운동의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식민지교육 철폐와 자주독립을 주장한 학생운동으로 ‘독립’운동으로 서술되어야 한다. 학교현장에서 혼란을 줄 수 있는 용어가 혼용되는 것은 학생들에게 역사를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된다.

그동안 친일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독재정권의 무관심과 왜곡, 그리고 분단 이후 이념에 치우친 경직된 사고와 오해로 학생독립운동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 않았다. 이제라도 학교현장에서 독립을 위해 치열하게 싸운 학생독립운동가의 정신을 계승하여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교육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아울러 전국에서 다양하게 전개되었던 학생독립운동의 활동 내용과 학생 독립운동가들을 발굴 정리하여 그들과 삶과 정신을 계승할 수 있도록 역사교육이 정착되었으면 한다.

이제 기념식은 국가보훈처가 주관하고 각종 행사는 교육부가 주관해 진행하기로 하고, 지난해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이낙연 국무총리 등 3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11월 3일 “정의와 공정으로 사회가 움직이도록 더 세심하면서도 더 강력하게 추진하려 한다”며, “학생들이 역사의 전면에 나선 최초의 사건으로 불의를 용납지 않는 학생들의 기상은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장엄하게 불타오르며 오늘에 이르렀다”고 평가했다.

이 총리는 “1960년 2월 28일 대구민주운동으로 시작해 대전, 광주, 마산을 거쳐 서울에서 꽃피운 4·19혁명은 이승만 정부의 12년 독재를 끝냈다. 유신독재를 무너뜨린 부마항쟁,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6·10항쟁도 학생들이 앞장섰다”며,

“학생들의 의로운 저항은 시민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며 시민주도의 5·18광주민주화운동과 최근의 촛불혁명으로 이어졌다. 그 자랑스러운 역사의 시작이 광주학생독립운동이었다”고 강조했다.

1929년 11월 전남 광주를 시작으로 이듬해 3월 전국으로 확산된 만세운동인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주도자 장재성(왼쪽 사진)과 장매성 남매(전남여자중고등학교 총동창회 제공)
1929년 11월 전남 광주를 시작으로 이듬해 3월 전국으로 확산된 만세운동인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주도자 장재성(왼쪽 사진)과 장매성 남매(전남여자중고등학교 총동창회 제공)

 

1. 광주학생운동의 주역 장재성을 독립유공자로!

광주 한일학생들의 충돌로 시작됐지만, ‘식민지교육 철폐’, ‘조선인 본위의 교육’을 요구하며 일제 식민통치에 항거한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산됐다. 그 중심에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고보) 졸업생 장재성(張載性ㆍ1908~1950) 이 있었다.

일본인 학생과 조선인 학생의 차별, 식민교육에 대한 불만, 사회주의 사상의 전파 등으로 1920년대 학생사회에서는 동맹휴학(맹휴)이 대표적인 독립운동 방법으로 등장했다. 광주고보 재학생 장재성은 친구들과 1926년 11월 광주지역 중등학교에서 최초 학생비밀결사인 사회과학연구모임 ‘성진회’를 만들었다.

성진회는 이듬해 3월 해체됐고 장재성도 일본 주오(中央)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그는 1929년 6월 대학을 중퇴하고 광주로 돌아와 학생사회과학연구모임의 조직화에 나섰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광주여고보) 학생들을 밀치고 지나간 광주중학교 일본인 학생들과 이를 목격한 광주고보 학생들과의 충돌이 벌어지고, 11월 3일에 광주고보 학생들이 광주중학교로 몰려가려 할 때 장재성은 시위운동을 지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했던 강석원 지사는 “장재성이 학생들의 투쟁대상을 광주중학교에서 일제 식민지지배로부터의 독립으로 전환시켰다”고 회고했다.

이날 200여명의 광주고보 학생들은 광주중학교가 아닌 광주 시내 중심가로 행진했고, 시위행렬에는 광주농고와 전남사범학교, 광주여고보 학생들도 가세해 300여명을 훌쩍 넘겼다. 일제는 72명의 한인학생을 검거해 62명을 검사국에 송치했다.

이후에도 장재성과 전남청년연맹 상무집행위원장인 장석천 지사 등 시위지도부는 시위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키고자 했다. 11월 12일부터 벌어진 2차 시위는 12월 서울을 비롯한 전국으로 확산되고, 간도지방까지 번져 이듬해 3월까지 이어졌다.

2차 시위 후 260여명의 학생들과 함께 구속된 장재성은 광주지방법원에서는 7년 형을, 대구 항소심법원에서 4년 형을 선고 받았다. 광주학생독립운동 관련자 중 최고형량이다.

그는 1962년 독립유공자 표창 대상자 208명에 포함돼 있었지만, ‘해방 후 조선공산당에 가입한 사실이 확인됐다’며 최종 탈락했다.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부 조직부장, 광주청년동맹 의장,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 전남대표 등을 지냈고, 분단에 반대해 세 차례 북을 오가다 1948년 검거돼 징역 7년형을 선고 받았다.

장재성의 최후는 참혹했다. 그가 광주교도소 복역 중일 때 6ㆍ25전쟁이 일어나면서 법적 근거도 없이 이승만 정권에 의해 총살당했다. 국가보훈처는 “장재성은 올해 삼일절을 계기로 공적 심사를 했으나, 포상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반면 함께 광주학생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징역1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던 여동생 장매성(張梅性·1911~1993) 지사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포상을 받았다.

 

2. 제90회 광주학생독립운동 서울기념식

11월1일(금) 18시에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제90회 광주학생독립운동 서울기념식이 재경광주서중일고총동창회 주관으로 열렸다.

이 날 한정일 건국대 명예교수는 “日帝 下 光州학생운동”이란 특강을 하였다. 아래 내용을 전제한다.
                                                                      
단재 신채호선생은 “역사를 망각한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라고 설파한 바 있다.

日帝 下 광주학생운동은 독립운동이요, 민족주의운동이었다. 나아가 “우리는 피 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 길 만이 우리의 생명이다.”라는 학생 탑의 상징은 한국학생이 나아갈 길이요, 미래이다.

(1) 민족주의 · 국민주의 · 국가주의로 번역된 “Nationalism”①은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에 따라 그 성격이 달라진다.
  
역사 · 사회 · 정치학자들의 연구를 참조하여 필자는 1983년 한국국제정치학회 발표논문 “한국 민족주의운동과 학생과의 관계 -日帝 下 光州학생운동을 중심으로–”에서 Nationalism은 어떤 민족·국가의 통일·독립·발전을 지향하   는 정신적이고 감정적이며 의식적인 상태로서 집단공동체의 응집력을 통한 하나의 에너지로 규정하였다. (사회과학에서 찾기 힘든 常數를 찾아보았다.)

따라서 Nationalism은 역사적으로 중산층과 결합하여 자유민주주의 추진력으 로 발전하였는가 하면, 반면에 자본주의와 결합하여 帝國主義化함으로써 일방에서는 억압과 침략으로, 타방에서는 자유와 독립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것이 강대국 민족주의와 약소국 민족주의 구별이라 말할 수 있다.

(2) 한국 학생운동은 그 대의명분을 아래와 같이 발견할 수 있다.
  ① 개화기부터 한일합방까지 자주 · 자강을 통한 국권회복운동
  ② 日帝 下 독립만세 · 제국주의 타도 · 피압박민족해방(1929.광주학생운동)
  ③ 해방 후 민족 통일국가와 민주주의 달성과제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민족주의운동의 전국적 시위는 1919년 3·1운동으로 시작한 민족자결주의 풍조라는 외부적 영향을 받았지만, 10년 후 1929년 11·3 광주학생운동은 순전히 현실적인 상황에서 폭발된 민족감정의 일대 항쟁이었다.
  
日帝의 착취와 억압에 항거한 농민운동과 노동운동, 그리고 학생운동은 식민통치라는 정치체제에 대해 1926년 6·10만세운동, 1927년의 신간회 결성 운동, 1929년 광주학생운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광주고보(현 광주일고, 서중 전신), 광주농업, 광주사범, 광주여고보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1926년 11월 조직된 광주학생 비밀결사인 성진회②와 그 후신인 독서회 및 소녀회는 광주학생운동의 모체인 비밀결사였다.

당시에 민족해방운동에 몸담고 있던 학생들에게는 사회주의가 日帝에 대해 투쟁이념의 한 형태로서 상당히 보편화되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3)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은 신간회를 통해 전국적으로 파급되었고, 1930년 1월 일본의 동경·경도, 중국의 북경·만주·길림·간도·상해에서 군중대회가 열렸고 노령 연해주까지 보도되기도 했다.
  
이처럼 항일민족운동의 선봉장이었던 광주고보가 1942년 광주 서중교로 교명이 바뀌면서 “西中魂”③이라는 이름 아래 1943년 5월 21일 제2차 光州 西中의 항일학생독립운동으로 민족·민주사적 맥락 속에 중요한 주류를 이루었다.

이상과 같이 한국 민족주의운동 전개과정에서 日帝 下 光州학생운동은 그 구호나 격문 내용에 투철한 투쟁의식, 정확한 현실인식, 대상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통해 해방 후 1960년 4·19 학생혁명, 1979년 10·16 釜馬민주항쟁에 이 어 1980년 5·18 光州 민주화투쟁, 1986년 10·28 변혁운동의 건대항쟁, 1987년 6·10 민주항쟁, 그리고 2016년 11월 촛불집회의 평화적 함성으로 이어져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그러나 대내외적인 대립갈등이 현존한다고 볼 때 그것  을 극복, 타개할 주체성 확립 과정이 당면과제라 말할 수 있다.

<참고사항>
① “Nationalism”
Hans Kohn은 최초의, 그리고 가장 뚜렷한 심리적 상태이며 의식 있는 행위로서 자기 자신의 개인적 인식을 그가 최고의 충성심으로 부여하는 집단의식에로 일치시키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Carlton Hayes는 민족이라는 의식을 가진 애국주의와의 혼합된 정신으로서 공동체의 역사적인 전통에 입각한 공통언어, 공통문자 등의 산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Boyd C. Shafer의 말을 빌리면, 자기가 속한 국가를 더 한층 강력한 것으로 만들어 보려는 정신적 기여 감정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Karl W. Deutsch는 특정지역 내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다른 지역사회사람들 보다 더 한층 밀접한 의사소통을 이룩하고 있는 의식의 연대 감정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② “성진회(醒進會)”
1926년 11월 3일 결성된 성진회 사건의 예심 종결서를 통해서 볼 때 첫째, 비밀결사와 기존 사회단체 또는 일반 민족해방 운동가들과의 관계이다.

당시 전남의 청년동맹이나 신간회, 기타의 지하조직과 성진회는 상당히 긴밀한 연락관계를 가진 것으로 1929년 광주학생운동을 서울로 확산·파급시키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던 것이다. 

둘째, 성진회의 창립목적은 성진회의 조직 강령에 명시되어 있듯이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는 것이었다. 즉, 성진회는 당시까지 학내 투쟁에 머물러 왔던 학생운동을 한 차원 높인 민족해방운동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소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성진회의 결성은 객관적으로 국내외 성숙되어가고 있던 민족해방 운동의 의지가 광주라는 특정한 지역에서 학생층을 중심으로 집약적으로 표현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③ “西中魂”
1929년~1930년의 항일학생 민족운동의 선봉장이 되었던 光州高普(1942년 光州西中校로 교명이 바뀜)는 그때의 항일투쟁정신을 <西中魂>이라는 이름 아래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갔다.

1943년 3월경에 일단의 학생들은 비밀회합을 열고 당시 한창이었던 친일파의 매국행위에 일대 경종을 가할 목적으로 전주북중, 순창농림, 고창중학 등과 연락을 취하여 같은 시각에 동맹을 결성할 것을 결의했다. 

‘학병지원 반대, 창씨제도 반대, 일어사용 반대, 징병제도 반대’ 등을 내걸고, 5월 21일 일제히 동맹휴학에 돌입했다. 이 동맹휴학이 6월말까지 계속되는 동안 350여 명의 서중생이 검거되고, 그 중 183명이 오랫동안 가혹한 취조를 받은 뒤, 80여 명이 송치되었다. 이것이 1929년 11월 3일 이래 제2차 광주학생 독립운동으로서 일제에 대한 저항의 횃불이었다.

* 한정일 글
  1. 민주의 표상 세운 혁명세대 : 건대문화 제3집, 1973년 pp. 48~54
  2.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역사적 의의 : 한국학생의 의식구조를 중심으로, 西中會 西中春秋, 1976년 봄호
  3. 한국민족주의 : 민족주의 운동사를 중심으로, 高大신문 1982년 10월 26일자 4면
  4. 韓國民族主義運動과 學生과의 關係 : 日帝下 光州學生運動을 中心으로, 국제정치논총 제23집, 1983년 pp.3~24, 한국민족주의와 국제정치 권두논문(국내학자 4인, 외국학자 14인 총 18편의 논문)
  5. 신군부 등장과 5·18 광주의 비극 5공 평가 대토론 : 현대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동아일보사, 1993년 11월 12~13일
  6. 건대항쟁의 재조명과 정치사적 의미, 현대정치사회 변동론, 도서출판 아침, 2008년, pp. 231~263

 

3. 여순 항쟁 특별법 제정을!

대한민국의 아픈 역사를 되돌아보는 역사의 성찰과 더불어 그 속에 담긴 참 뜻을 되새겨 바른 이름을 짓자는 정명(正名)운동이 곳곳에서 한창이다. 이른바 '여수·순천반란사건'으로 규정된 1948년 '여순반란사건'도 '여순 항쟁'이라는 새 이름으로 정명하려는 공론 과정을 거치고 있다.

여순사건, 여순반란사건, 여수 14연대 반란사건, 여순 봉기, 여순 항쟁, 여순 군란이라고도 부른다. 제주 4·3 사건과 함께 해방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좌익과 우익의 대립으로 빚어진 민족사의 비극적 사건이다.

이승만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강력한 반공국가를 구축하였다. 흔히 ‘여순반란사건’이라고 하였으나, 해당 지역 주민들이 반란의 주체라고 오인할 소지가 있다고 하여, 1995년부터는 '여수·순천사건' 또는 '여수·순천 10·19사건'이라고 사용한다.

불의한 일을 저질러 놓고 이를 ‘정의’라는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흔히 권력자가 저지른다. 공자는 ‘논어’에서 정치를 맡기면 무엇부터 하겠느냐는 질문에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겠다(正名)”고 대답했다.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답게 되는 것(君君, 臣臣, 父父, 子子)”이라고 표현했다.

이름(名)에 부합한 실제(實)가 있어야 비로소 그 이름이 성립한다는 의미이다. 불의한 사태는 ‘불의’라는 이름을, 정의로운 사태에 대해서는 ‘정의’라는 이름을 붙이겠다는 뜻이다.

1894년의 농민봉기는 오랫동안 ‘동학난’으로 불렸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에는 ‘동학혁명’ 또는 ‘동학농민전쟁’으로 바뀌었다. 1960년의 4·19학생운동은 이제 ‘4월 혁명’으로 불린다.

1980년 5월 전두환 신군부에 맞서 광주에서 일어난 민중봉기는 전두환 정권 내내 ‘5·18사태’로 불렸다. 이제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란 공식명칭을 얻었다. 1987년 6월 전두환 정권에 맞서 전국에서 불길처럼 타오른 시민항쟁은 ‘6·10 민주화운동’으로 명명됐다. 권력의 불의한 명칭이 정명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바른 이름을 얻지 못한 채 떠돌고 있는 역사적 사건들이 있다. 제주 4·3과 여순사건이 대표적이다. 이들 사건은 지난해 70주년을 맞아 진상규명과 함께 바른 이름 찾아주기 운동이 벌어졌으나, 아직 해결되지 못했다.

제주 4·3은 ‘사태’ ‘항쟁’ ‘학살’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제주 4·3평화박물관에 누워 있는 비문 없는 백비에는 아직 이름이 새겨지지 않았다. 여순사건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동안 ‘여순 반란’으로 불려왔다. 이에 대해 지역학계에서는 ‘여순 항쟁’으로 바꿔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 사건이 정명을 얻지 못한 이유는 우리사회가 아직도 냉전 이데올로기의 그늘 아래 놓여 있기 때문이다. 외세에 의해 해방을 맞은 한국은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심각한 좌우대립을 겪었다. 하지만 대다수 민중은 이념과는 무관했다.

순박한 이들은 ‘빨갱이’로 둔갑되어 무고한 희생을 치렀다. 가족이 희생당했어도 후손들은 연좌제 때문에 침묵하며 살아야 했다. 그들이 ‘국가폭력과 역사왜곡을 바로잡고, 명예를 회복시켜 달라’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제주 4·3’은 1948년 4월 3일 소요사태로부터 시작됐다.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2만 5,000~3만 명의 양민이 희생됐다. 남로당 제주도당이 군경과 서북청년단 등의 폭압에 반발해 경찰서 등을 습격하면서 시작됐다.

8월 15일 수립된 대한민국정부는 군대를 증파하고 계엄령을 선포하며 강경진압에 나섰다. 민간인을 집단살상하고 중산간 마을의 95%이상을 불태웠다. 이승만 정부는 6·25전쟁 때까지 남아 있던 무장대를 진압했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발생했다. 여수 주둔 14연대가 ‘동포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며 제주 4·3 진압명령을 거부하면서 촉발됐다. 당시 정부수립 두 달도 안 된 이승만 정권은 함정까지 동원한 육해공 입체작전으로 9일 만에 진압했다.

일부는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됐다. 이승만 정권은 이를 계기로 국가보안법을 만들었다. 여수 순천 보성 등 전남 동부지역에서는 피바람을 몰고 왔다. 부역자 색출 명목으로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여순사건은 1995년 ‘여순10·19사건’이란 중립적 명칭을 얻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9년 여순사건 민간인희생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진화위는 주민 890명이 군인과 경찰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당했다며, 희생자와 유족에게 공식 사과하도록 국가에 권고했다.

그러나 사건의 진상은 밝히지 못했다. 국가추념일로 지정되지도 않았고, 대통령의 공식사과도 없었다. 게다가 보수진영에서는 아직도 ‘남한적화기도 무장반란폭동’이란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일부 보수단체는 수차례 소송을 제기하고 이념공세를 퍼붓고 있다.

지난 10월 19일 전남 순천시 장대공원에서 전라남도와 여순 항쟁 유족연합회가 주최하고, 순천시와 (사)여순 항쟁 순천유족회가 주관한 여순 항쟁 71주년 민간인 희생자 합동 추념식이 열렸다.

여순 항쟁 유족연합회는 전남 동부의 6개 시군 지역(여수, 순천, 광양, 구례, 보성, 곡성)과 전국에서 활동하는 미 신청 유족을 포함한 천 여 명이 회원으로 구성된 단체이다. (사)여순 항쟁 순천유족회는 2002년에 창립, 2005년에 사단법인으로 설립하여 2016년 4월에 순천버스종합터미널 사거리 인근에 유족회관을 개관, 회관 내에 여순 항쟁 역사관도 마련할 예정이다.

올해는 예전과 달리 순천만이 아닌, 전남 지역 합동으로 열린데다, 위령비가 있는 팔마체육관 뒤편이 아닌, 당시 격전지이자 시민들이 즐겨 찾는 동천 장대공원에서 열렸다. 그리고 송승문 제주 4·3 희생자 유족회장이 다수의 유족들과 참석했다. 또한 도지사를 비롯한 단체장들이 특별법 제정에 노력할 것을 굳게 다짐해 더욱 의미가 있었다.

게다가 유족과 함께 입장한 송산초 학생들 및 순천 YMCA 청소년연합회 회장인 김채원 강남여고 학생의 기림사 낭독마저 있어서, 70년이 넘도록 '빨갱이'라는 낙인에 피해자이면서도 숨죽여 피눈물을 흘린 유족들의 마음을 달래줬다.

이에 김영록 전남도지사는 추념사 첫머리에서 "여순사건 유족들과 슬픔을 나누고 특별법 제정에 힘을 보태주시기 위해서 멀리서 와주신 제주 4·3사건 희생자 유족회 송승문 회장님과 유가족 여러분들께 각별한 감사"를 드린다고 언급했다.

이어 여순 항쟁의 도화선이 된 제주 4·3사건은 이미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국가가 책임을 인정하며 대통령이 직접 사과까지 한 것을 알리며, "이제는 여수 순천 10·19사건도 국가가 발 벗고 나서서 진상규명을 밝혀야 한다. 불행한 과거사를 정리하고,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시켜야"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반목과 불신의 시대를 끝내고 화합과 상생의 시대를 나갈 수 있다. 그 시작이 바로 여수 순천 10.19 특별법 제정"이라며, "내년부터는 우리도 주관으로 민관협의회를 만들어서 희생자 명예회복과 위령사업을 추진. 합동위령제를 열고 올바른 역사 교육으로 도민과 국민의 인식을 바로잡아" 나갈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지난 10월 10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전라남도 국정감사 때 여순 항쟁 유족연합회 회원들께서 이채익 감사반장께 특별법 제정을 통해 유족들의 한 맺힌 눈물을 닦아달라며 울먹이시던 것에 가슴이 뭉클"했다며, "10월 16일에 민주당 이해찬 당 대표와 당 지도부에도 특별법 제정을 위해 신속한 처리를 간곡히 요청했다. 정치권에서도 여수 순천 특별법 제정에 초당적으로 협력해 줄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말했다. 
 
앞서 여순사건으로 처형된 3인의 유족이 청구한, 형사소송 첫 재심이 71년 만에 지난 4월 29일 순천에서 열렸으나, 여전히 진행이 더디기만 하다. 형사소송을 한 유족 중에서 유일한 생존자인 장경자 유족도 합동 추념식에 참석했다.

제주 4·3은 민주화이후에야 진상규명작업이 본격화했다. 2000년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다. 보수진영의 끝없는 공격을 겪으면서도 2003년 10월 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됐다. 희생자의 넋을 위령하기 위한 기념사업도 이어졌다.

제주4·3평화공원 조성을 비롯해 유해 발굴, 유적지 복원, 위령제 등도 진행됐다. 2014년에는 4월 3일이 기념일로 지정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70주년 제주 4.3 추념식에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중단되거나 후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최근 제주 4·3 생존 수형인 18명이 사실상 무죄를 인정받았다. 불법 군사재판 재심 선고공판에서 공소기각 판결을 받았다. 이들은 1948∼1949년 내란죄 등 누명을 쓰고 징역1년에서 최장 2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이번 판결은 계엄 하에서 이뤄진 군사재판은 불법이며, 그로 인해 감옥에 갇힌 수형인들이 무죄임을 인정한 최초의 사법적 판단이다. 이제 제주4·3의 바른 이름을 찾는 일만 남은 셈이다. 이를 위해서는 ‘4·3 특별법’의 개정이 조속히 이뤄져야 한다.

한편, 장대공원과 순천대학교 등 순천 9곳에 여순 항쟁 기념비가 최근에 설치되었다. 그리고 순천대 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는 특별전으로 "2019 여순 평화 예술제: 손가락 총"이 10월 19일부터 11월 10일까지 열린다.

다양한 지역 28명의 작가들이 참여한 이번 전시전은 순천대 박물관, 여순사건영상기록위원회, 부산민주공원, 포지션민제주가 공동주최했으며, 전시일정 이후에는 부산민주공원과 포지션민제주 등에서 순회전도 갖는다.

순천에서도 여순 항쟁 기념식을 했다. 여순사건 순천 희생자 추념식이 아니라 여순 항쟁 유족회가 주최하는 기념식이다. 왜 순천은 항쟁이고 여수는 사건인지, 여수는 스스로 자문해서 창피함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제주도민 학살명령을 거부한 다음의 호소문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애국인민에게 호소함 : 우리들은 조선 인민의 아들, 노동자, 농민의 아들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사명이 국토를 방위하고 인민의 권리와 복리를 위해서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제주도 애국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작전에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조선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인민의 복지를 위하여 총궐기하였다.
▷1. 동족상잔 결사반대 ▷2. 미군 작시 철퇴
– 제주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

1948년 10월 19일.
여수의 14연대 군인들은 이렇듯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조선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총궐기했다. 다음날에는 여수인민위원회가 인민대회를 열고 활동을 시작했다. 인민위원회는 행정기구를 접수하고, 일제부역자 처벌, 토지개혁 등을 결의한 후, 친일경찰 체포, 친일파 예금동결 및 재산 몰수, 식량 배급 등 해방 후 조선사회의 숙원인 민족적 과제의 해결을 시작했다.

14연대에는 3개의 대대가 있었다.
광주에서 4연대가 기간병력 300명 정도 여수로 내려오고, 그 기간병력을 중심으로 전남 동부지역에서 모병을 했다. 이렇게 14연대가 창설됐다. 14연대는 1948년 5월에 창설됐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은 그해 8월 15일이다. 남한 단독선거를 하기 전에 UN의 합의사항이 있었는데, 그게 미군철수다. 1948년 5월 전까지는 남한에는 9개 연대밖에 없었다.

경기도 1연대(현 서울시 노원구), 충청남도 2연대(대전), 전라북도 3연대(이리), 전라남도 4연대(광주), 경상남도 5연대(부산), 경상북도 6연대(대구), 충청북도 7연대(청주), 강원도 8연대(원주), 제주도 9연대. 이렇게 단독선거를 하기 전까지는 남한에 9개 연대뿐이었다.

그런데 단독선거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하게 되면 미군을 철수한다는 약속을 한 상태였다. 9개 연대밖에 없어서 국방력이 약해질 거라는 판단 하에 만든 게 1948년 5월 10~15연대이다. 즉 미군철수로 6개의 연대가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즉 14연대는 늦게 만들어진 부대고, 주요 병력들은 광주 4연대 출신들이다.

현재 우익단체와 국가가 저술한 많은 서적에서 봉산지서가 공격을 받아 불이 나고 경찰이 죽었다고 쓰고 있지만, 이곳은 불이 나지도 않았을 뿐더러 경찰관 단 한명도 죽지 않았다.

당시 봉산지서 주임 신영길이 2015년까지 살아 있었는데, 그가 쓴 책 ‘신영길의 역사의 현장’에 자신이 봉산지서에서 본 14연대의 모습과 봉산지서 주임으로 오게 된 과정을 모두 기록했다. 그러나 많은 국가와 정부단체에서는 14연대 군인이 반란이고 빨갱이임을 인식시키기 위해 “(그들이)모든 경찰서를 불태우고 경찰을 보면 전부 죽였다”라고 썼다.

하지만 당시 여수에서 불이 난 곳은 서정지서와 쌍봉지서 뿐이었다. 이마저도 서정지서는 14연대 군인들이 불을 지른 게 아니라, 박격포 때문에 불이 난 거였다. 그리고 쌍봉지서는 여순사건 이후 좌익 활동들이 강화되며 불이 난 것이다. 즉 “여순사건으로 시내의 모든 지서가 불탔다”는 말들은 모두 거짓이다.

인민유격투쟁을 벌일 지리산으로 가는 게 목적이었던 14연대는 기차를 탈 수밖에 없었다. 14연대가 위치한 서쪽 끝에서 동쪽 끝으로 가려면, 여수의 중심부를 관통해야 했다. 즉 14연대는 지리산으로 가려는 것 뿐, 도시를 장악하려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현재는 봉산동을 거쳐 서교동에서 직진하면 중앙동으로 가지만 당시는 바다였다. 즉 이곳은 1960년대에 매립된 곳이다. 14연대는 서교동에서 한재사거리 쪽으로 올라와서 충무동을 통해 시내로 향했다.

교통 접근로가 많은 순천과 달리, 여수는 육상의 유일한 길이었던 이곳 잉구부에서 시민들은 전투에서 승리한다. 토벌대는 송호성 최고사령관이 선두로 나섰으나, 매복하던 시민군에게 기습을 당하여 사령관이 다치고 함께 있던 미국인 종군기자 두 명은 사망했다.

한국의 군대를 장악하던 미국 종군기자가두 명이나 죽었으니 난리가 날 수밖에, 결국 송호성은 전투에서 지고 순천으로 후퇴한다.

이 후퇴과정에서 미평동을 지나치는데 마을 사람들이 처음 본 장갑차에 놀라 도망을 가고, 이들은 도망간 사람들을 잡아서 즉결 처형했다. 결국 여수는 10월 24일 첫 전투도 승리하지만, 동시에 미평에서 약 마흔 명의 시민이 죽게 된다.

잉구부 전투에서 패한 미군은 다른 전략을 쓴다. 이미 한번 패한 길을 다시 올 수 없으니 26일 전투에서 미군은 여수의 주요 산(구봉산, 장군산, 종고산, 마래산)을 넘어 시내로 진격한다.

현재 여수시내에는 일제강점기 시설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데, 이는 26일과 27일 시내 한 가운데에 집중포격을 받아 불바다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집중포격의 이유는 바로 24일 잉구부 전투다.

여순 항쟁에서 5차례 전투가 있었고, 네 차례는 시민들이 막아내고 마지막 전투에서 패배한다. 패배 이유는 국내 15개 연대 중 7개 연대 병력이 여수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공군이 없던 당시 국내 몇 대 없는 육군비행정찰대와 해군함대가 여수로 출동하여 포격한다. 그러니 여수에는 일제강점기의 시설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잉구부 전투에서 패하자 미군은 산 능선을 넘어 여수로 간다. 산 능선을 넘어가며 산 곳곳과 여수 시내를 집중포격하면서 여수는 불바다가 된다.

그렇다면 여수시민들은 어떻게 다섯 차례 전투 중 네 차례를 극렬하게 막아냈을까. 바로 인민위원회 때문이다.
 
과거 서교동에 있던 전신전화국 뒤 건물은 식량영단창고였다. 여수인민대회를 10월 20일에 진행하고 제일 먼저 식량창고를 점령하였다. 당시는 식량을 배급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관료들은 쌀이 없어서 배급을 못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창고 문을 열었더니 쌀은 썩고 있었다고 한다.

전신전화국 넘어 현재 교동시장이 있는 곳은 지금은 매립되어 도로지만, 이곳은 당시에는 바다였다. 그래서 14연대 군인들은 한재사거리 쪽으로 올라와서 여수역으로 향했다고 한다.

80년 광주와 마찬가지로 여수도 죽을 줄 알면서도 항쟁했다. 그래서 여순 항쟁이다. 여수 청년학생 시민군들이 목숨을 바쳐 사수하려다 빼앗겼는데, 진정으로 외세로부터 해방되어 통일된 나라, 친일반역자들이 척결된 세상. 민족 자주권, 민주주의를 희구했다. 만약 여수 청년학생 시민군들이 이승만 진압군에 저항하지 않았다면, 여수는 학살당한 것만 기억되는 통한의 도시가 되었을 것이다.

이미 역사학자들은 ‘항쟁’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밝혀 왔다. 이제는 관습적 추념식만 연례행사로 치룰 것이 아니며, 여순 항쟁을 기리는 기념식이 되어야 한다. 여순 항쟁 기념식 일부로 추념이 들어가야 하는 것이지, 항쟁은 숨겨놓고 죽음 자체만 노출시킨 추념식만 요식행위로 치루면 안 된다.

진정한 명예회복이란 반민족 반민주 친일부활세력에 저항한 명예스런 여수였다는 것을 인정받는 것이다. 이미 서울에서는 여순 항쟁으로 기념식을 해 왔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에게 붙었던 빨갱이 딱지를 떼어내고,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은 건전한 시민이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올해 같은 날 다른 장소에서는 여수지역신문사 연합으로 여순 항쟁 기념 그림 전시회를 가졌다. 화가가 여순 항쟁 유족이라고, 유족이 항쟁이라고 한다.

한쪽에서는 학살 당 함은 비통하지만 항쟁기억을 되찾은 항쟁행사를 하고, 한쪽에서는 학살 당 한 아픔만 기억하는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추념행사를 하는, 참 이상한 여수다.

아직까지 보수단체에서는 14연대 봉기군 주동자로 지창수 상사나 김지회 중위 등이 남로당이었느니, 빨갱이었다는 따위로 부각시켜 여수를 반란 도시로 묶어두려고 한다.

14연대 봉기군 주동자가 사회주의 사상에 물든 남로당원이라고 반란이라고 한다. 당시 국민대다수는 사회주의를 선호했다. 지금 북한처럼 왕족세습전제주의 국가를 바랬던 것이 아니라, 순수한 사회공동체 사회를 바랬던 것이다.

여순 항쟁 성격은‘ 제주도민을 학살 하라’는 부당한 명령을 거부한, 동족상잔 절대반대와 해방된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미군 즉시철수였다.

사단법인 여수지역사회연구소가 여순 항쟁 71주기를 맞아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을 위해 관련 사업 추진에 박차를 가한다. 10월 2일 여수지역사회연구소에 따르면, 서울추모문화제 및 행사추진위원회와 공동으로 10~11월 서울추모문화제, 특별법제정촉구 기자회견, 학술대회, 칼 마이던스 사진도록 출판기념회, 공동수업 자료집 발간 등 5개 사업을 진행한다.

연구소는 20대 국회에 계류 중인 여순사건특별법에 대한 12월초 국회심의 일정에 맞춰, 특별법 통과를 위해 전력을 다하겠다는 계획이다. 연구소는 먼저 오는 10월 21일 오후 1시 국회 정문 앞에서 여순 항쟁 서울유족회와 서울행사추진위원회가 공동으로 여순사건특별법 제정촉구 기자회견을 연다.

기자회견에는 여순사건특별법 발의의원들과 전남도지사, 여수시장, 여순항쟁서울유족회장과 여수유족회장의 추모사 및 시민사회단체들의 연대사 등이 있을 예정이다.

또 10월 21일 오후 2시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는 전남도와 여수시 및 주승용 의원실 공동주최, 서울행사추진위원회와 한국민족춤협회 주관으로 ‘여순 항쟁 71주년 특별법제정을 위한 서울추모문화제’를 개최한다. 추모문화제는 김영록 전남도지사 등의 추모사에 이어 혼맞이, 초가망석, 항쟁과 학살, 넋풀이, 유족 영상증언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이어 11월 14일 오후 2시, 국회의원회관 제3세미나실에서 여순사건특별법 제정촉구를 위한 여순 항쟁 71주기 학술대회도 개최된다. 학술대회는 전남도와 정인화 의원 공동주최, 여수지역사회연구소와 서울행사추진위원회와 공동주관으로 열린다.

학술대회의 발제는 △여순사건과 계엄, 그 영향(김춘수/국가기록원) △ 여순사건과 군 권력의 변화 (노영기/조선대학교) △ 진실화해위원회의 여순사건 진상규명 보고서 검토(정호기/전남대학교) △여순사건특별법 제정의 필요성과 그 내용(이영일/여수지역사회연구소)을 주제로 발표한다.

또 여순 항쟁 당시 라이프지의 종군기자였던 칼 마이던스의 사진을 도록으로 출판해 출판기념회도 열린다. 출판기념회는 오는 11월 20일 오후 2시 국회의원회관 회의실에서 광양만권광역행정협의회 주최, 여수지역사회연구소와 서울행사추진위원회와 공동주관으로 진행된다.

오는 11월 중순에는 여순 항쟁 공동수업 자료집도 발간된다. 자료집인 중고등학생 대상 계기수업의 일환을, 전남도교육청의 후원으로 여수지역사회연구소가 발간한다. 자료집에는 사료에 입각한 여순 항쟁의 역사개요, 전남 동부지역의 학살지도와 내용, 학습모형, 기타 여순 항쟁 관련 미술, 음악, 문학자료 등을 담길 예정이다.

자료집은 중고등학생들에게 여순 항쟁에 대한 역사를 바르게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사단법인 여수지역사회연구소는 여순 항쟁 71주기를 맞아 지난 3월부터 여순 항쟁 관련 5개 사업을 준비해왔다. 여순항쟁서울유족회는 지난 9월 9일부터 국회 앞 1인 시위와 국회의원 개별면담 및 설득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2019. 11. 4
사회적협동조합연합회중앙회 회장 한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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