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문학가 시인 명예문학박사 김철민<br>
아동문학가 시인 명예문학박사 김철민

따스한 남쪽 바람이 불어와 양지쪽 개나리의 꽃망울이 우리의 시선을 끌고 우리의 가슴속에도 지난 계절의 추웠던 기억도 씻어 버리고 새로운 희망을 기다리는 때가 오늘 3.1운동 101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1919년 기미년 3월1일 낮 12시에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한꺼번에 터진 대한독립 만세 소리가 온 나라를 뒤 흔들었고 가는 곳마다 태극기를 들고 흔들며 일어선 전 국민의 독립운동이다.

이 반일운동은 1919년 1월 일본의 심장부인 동경기독교청년회관 (YMCA)에서 우리나라 유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미국의 윌슨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와 파리강화회의 및 국제연맹에서 한국을 비롯한 약소민족대표의 발언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보도 등을 접한 것과 재미 동포들이 한국인의 독립운동에 대한 원조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미국 정부에 제출했다는 보도를 접한 재일 유학생들이 웅변대회를 열어 독립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을 결의하고 10여명 실행위원등 27명 유학생이 체포되어 온갖 핍박을 당하고 이때 유학생들은각기 자기고향으로 내려가 독립운동을 펼치며 분위기를 고조시켜 마침내 ‘조선청년독립단’을 급히 결성하여 이광수가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백관수가 낭독함으로 대한민국의 독립을 세계만방에 알린 역사적인 쾌거였다.

일본의 동경유학생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2.8 독립선언의 비화를보면 1919년 1월쯤 일본에서 유학생대표 송계백이 춘원 이광수가 쓴 독립요수선언서 초안을 자신의 모자 챙 속에 숨겨가지고 고국에 돌아와 곧 바로 보성중 선배이자 유학생 정신적 대들보였던 한상윤을 찾아간다.

한상윤은 1년전 동경유학을 마치고 고국에 와서 보성중교사로 근무하였는데 송계백이 숨겨 가져온 ‘독립요구선언서’ 초안을 보여주며 필요한 경비를 요구하여 한상윤은 평소 독립을 위한 민족봉기를 염두에 두고 천도교가 이 일을 주축이 되어야 하고 그의 모교이자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보성중학교 최린교장에게 송계백을 데리고 찾아가 동경에서의 계획과 필요한 조치를 보고했다.

국내에서 천도교 측 최린 (보성중교장) 오세창, 권동진 세사람이 교주인 손병희를 보좌하고 독립운동의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운동 3대 원칙으로 추진계획을 세워 한상윤 (중앙중교사) 최남선과 연락 동참해 줄 것과 선언문을 기초하겠다고 약속을 받았다 또 기독교와 연결책임을 맡은 한상윤은 김도태를 정주로 보내 남강 이승훈을 모셔오도록 하여 최린, 이승훈 함태영 한용운(님의 침묵) 백용정과 만나 불교계까지 이 운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윌슨대통령이 주장한 ‘각 민족이 자기의 정치적 조직이나 귀속 문제를 다른 민족이나 국가의 간섭, 압력을 받지 않고 선택하고 결정한다.’는 민족자결주의에 자극을 받아 1919년 기미년에 손병희 등 33인이 민족자결주의 사조에 따라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고자 그 해 3월1일 서울종로2가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시위운동을 일으켜 온 겨레가 민족 해방을 위하여 일본 관헌과 싸웠으나 일본 군대의 출동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져가기 시작한 이 시위운동은 일본의 총칼 속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고 몇 개월 동안 계속 되었으며 사상자만도 5천명 투옥자가 4만 7천명에 달 하였다. 결국 3.1운동은 우리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사랑하는 민족정신의 발로이며 문화 민족으로서의 얼이 표출된 것이라 볼 수 있었다.

3.1운동때 남강이 보여준 진면목은 상해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들과 연계하여 상해 임시정부 수립의 초석이 되었다고 일부는 보고 있다

천도교와 기독교라는 이질적인 두 종교를 연결시키고 나중에 불교까지 참여시켜 민족대표 33인 구성하는 과정에는 과감한 실천과 포용력이 없었다면 3.1운동은 성사될 수 없었을지 모른다.

그중 민족대표33인의 서명 순서를 놓고 종교간의 대립이 나타났을 때 남강이 나서서 “순서가 무슨 순서야 죽는 순서지 손병희부터 써‘ 라고 하여 문제를 해결한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역사를 굳이 가정할 필요는 없지만 만약 그때 상인 출신으로서 실용적 사고와 실천력을 겸비한 남강이 없었더라면 명분과 체면을 중시하는 선비와 교리에 얽매이는 고루한 성직자들이 모여서 이질적인 종교간의 화합과 일치를 이루어낼 수 있겠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대한민국 제헌헌법 전문에도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 독립 국가를 재건함에 있어’란 대목이 기록되어 있다.

3.1운동은 우리 민족운동 사의 전환점이었던 만큼 역사적 의의도 매우 크다고 볼 수 있고 국민의 독립운동이다.

여기서 남강 이승훈은 일제하(日帝下) 기독계의 민족지도자로서 독립운동과 교육활동에 큰 공적을 남기고 애국정신과 교육정신은 영원히 우리민족의 가슴에 남아 그의 문하생중 주기철, 한경직과 같은 한국교회사를 대표하는 목사, 함석헌 민권운동 양심적인 종교사상가, 한국최고 서정시인 소월 (김정식) 민족혼을 예술로 승화시킨 소의 화가 이중섭과 의학계의 백 병원 설립 (백인제)등은 44살 1907년 평양에서 도산 안창호선생의 ‘나라가 없고서 한 집과 한 몸이 있을 수 없고 민족이 천대를 받을 때에 나 혼자만 영광을 누릴 수 없소’ 라는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아 다음날 즉시 삭발하고 술, 담배 끊고 용동(龍洞)으로 들어오자마자 강명의숙(講明義塾)이라는 소학교를 설립 했는데 이것이 바로 오산 학교의 전신이다.

이것이 제자들에게 인격적인 감화와 교훈을 주었기 때문에 오산학교를 통해서 수많은 민족의 지도자를 배출했다는 사실에서 남강의 위대함을 새삼 깨닫게 된다.

남강의 성실과 근면함은 독립운동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언제나 궂은일을 맡아 남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이타적인 모습을 통해 독립운동가 사이에 신망을 얻고 3.1운동을 거사할 때도 불과 19일간의 짧은 일정동안 잠시도 쉴틈없이 서울과 평양 선천 등을 오가며 24회의 회합을 주선하고 48명의 인사들을 만나 기어코 성사 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민족의 역량을 기르는 일이지 남과 연결하여 남의 힘을 불러들이는 일은 아니다 나는 씨앗이 땅 속에 들어가 무거운 흙을 들치고 올라올 때 제 힘으로 들치지 남의 힘으로 올라오는 것을 본 일이 없다.

1986년 8월15일 독립기념관에 선 남강 이승훈 어록비

우리나라는 이 날을 길이 빛내고 애국심과 자주 독립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 받기 위해 1949년 10월1일 법률 제53호로서 3.1절을 국경일로 정하고 조상의 빛난 얼 즉 애국 애족심과 자주 독립의 자세를 배우고 개척의 정신과 협동의 위대함을 깨달아서 국가와 민족을 위한 국민 각자의 책임과 의무를 다해 굳게 뭉칠 때 통일의 그날은 꼭 온다.

해마다 3월이 오면 우리민족은 나라와 국가를 위해 붉은 피를 흘리며 쓰러져간 순국선열을 다시 되새기며 간교함을 아직도 버리지 못한 채 북한의 핵무기 밑에서 교묘하게 국력을 신장시키고 감추어 두었던 침략자의 발톱을 조금씩 들어내는 북한의 공산정권과 우리 땅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 우기며 여전히 우리나라에 대한 망언을 일삼고 있는 일본

우리나라 국회의원과 정치인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국민을 하늘이하고 모셔라 그리고 양심과 봉사하면서 신뢰를 쌓아 복된 대한민국을 만들자 우리국민들의 의식이 보다 성숙해져 당장 눈앞의 달콤한 유혹보다는 국가장래를 생각하면서 현명하게 견제할 수 있어야 된다는 생각이다

3.1절을 맞이하여 우리가 세계인이 하나가 되는 것을 배우고 평화를 창조하는 사람 겨레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도록 서로 도와주고 배려하는 우리국민들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

대한민국에 불고 있는 코로나19 호흡기 증상 있으면 선별진료소나 보건소 상담을 해주시고 국민모두 ‘하나가 되어 힘 모아’ 코로나19 예방 극복에 최선을 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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