뱅쇼 이미지. [이미지출처=미리캔버스]
뱅쇼 이미지. [이미지출처=미리캔버스]

[시사프라임/고문진 기자] 얼마 전 현장취재를 마치고 근처 카페에 가서 뱅쇼 한 잔을 시켰다. 평소 단 음료를 좋아하지 않지만, 거리에 울려 퍼지는 캐롤하며 익숙한 연말 풍경이 펼쳐지는 이맘때가 되면 시큼달달한 뱅쇼 한 잔이 생각난다.

여름이 되면 매실청을 담그는 엄마들처럼 출산 전까지만 해도 해마다 뱅쇼를 만들어 먹는 게 지극히 개인적인 연례행사였다. 

심지어 과일은 사치라는 자취생 신분일 때에도 나름의 방식으로 끓여 먹곤 했는데, 생각해보면 그 시작은 막연한 동경이었다. 벽난로 주변에 앉아 다 같이 꾸민 트리를 보며 따끈한 음료 한 잔을 마시는 외국 영화의 한 장면처럼 포근한 가족에 대한 동경.

아무튼 그랬던 시절이 있었는데, 한번은 커피 포트를 이용해 야매 뱅쇼를 끓여 온 방에 보라색 찐득이를 양산한 적이 있다.

자취 시절 독감에 걸린 룸메이트에게 뭐라도 해주고 싶어 슈퍼에서 3천 원이 안 되는 아주 저렴한 와인을 한 병 사 포트에 붓고, 약국에서 언제 받아온 지 기억도 안 나는 쌍화탕 한 병과 껍질 수분이 다 날아간 귤 두 개를 넣고 물 끓임 버튼을 눌렀다.

혹여 넘칠까 봐 와인을 나름 소량만 넣었는데 보글보글 끓는 소리와 함께 좁은 포트 주둥이 사이로 보랏빛 폭죽이 터졌고, 바닥은 지켰으나 하얀 벽지는 지켜내지 못했다. 그래도 처참한 현장을 뒤로하고, 연신 맛있다는 말과 함께 호호 불며 잘 마셔주는 룸메이트를 보며 뿌듯했던 기억이 난다.

프랑스어로 ‘따뜻한 와인’이라는 뜻의 뱅쇼는 와인에 각종 과일과 향신료를 넣고 끓여 만든다. 끓이는 과정에서 와인 속 알코올이 증발되기는 하지만, 2시간 이상 푹 끓여야 무알콜에 가까워진다고 하니 알코올에 민감하다면 애초에 무알콜 와인을 넣어 만드는 것을 추천한다. 참고로 국내 커피 프렌차이즈에서 겨울 시즌 메뉴로 판매하는 뱅쇼는 대부분 무알콜이라 안심하고 마셔도 된다. 

뱅쇼를 ‘서양식 쌍화탕’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쌍화탕처럼 감기에 효과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학적으로 검증된 바가 없으며, 유자차나 모과차를 마시면 감기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맥락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일전에 언급했던 전찌개처럼 뱅쇼 역시 명절 이후 혹은 주변의 선물로 갑자기 늘어난 냉장고 속 과일을 정리하기 좋은 레시피이다. 와인과 향신료가 부담될 수 있는데, 우선 향신료는 앞서 말했듯 쌍화탕이나 수정과로도 대체 가능하다. 

와인은 마트나 슈퍼에서 제일 저렴한 거로 고르면 되는데, 포도맛 베이스를 낼 수 있는 포도주스로도 대체 가능하다. 어차피 뱅쇼는 가열 과정 그리고 첨가되는 과일과 향신료로 인해 맛과 향의 변형이 오기 때문에 비싼 와인이 필요 없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지만, 그럼에도 와인에 무게를 두고 싶다면 개인의 기호와 상황에 맞춰 준비하면 된다.

뱅쇼는 들어가는 재료만큼이나 불리는 이름도 다양하다. 스칸디나비아에서는 글뢰그, 영어권에서는 멀드와인 그리고 독일에서는 글뤼바인이라고 부르는데, 2020년 1월 22일 출판사 시대의창 김성실 대표가 한국일보에 기고한 기사를 보면 글뤼바인이 원조라고 소개한다.

글뤼바인은 독일의 온(溫)포도주로, 1,400년경 포도를 재배해 와인을 만들던 독일의 어느 농부가 감기 예방을 위해 여러 향신료를 넣고 데워 마신 데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유럽와인법에도 글뤼바인 규정은 있지만, 뱅쇼 규정은 없다는 게 김성실 대표의 설명이다.

이외에도 뱅쇼는 고대 이집트에서 와인에 여러 가지 재료를 넣고 끓여 마시기 시작했다는 주장도 있고, 로마시대 때부터 마셨다는 이야기도 있다. 로마의 역사학자 플리니는 당시 피멘트라고 불렸던 뱅쇼의 효능을 찬양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고, 히포크라테스는 뱅쇼를 약으로 처방하기도 했다. 그래서 중세 유럽에서는 뱅쇼를 히포크라테스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설이 있다.

나라별로 레시피에도 차이가 있는데, 특이점이 있다면 프랑스 뱅쇼에는 꼬냑이 들어가고, 스칸디나비아는 브랜디와 건포도, 아몬드를 첨가한다. 중세시대에는 후추가 들어가는 레시피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요즘은 워낙 잘 만들어져서 나오니 재료를 다듬고 끓이는 그 시간이 번거롭다면 간편하게 사 먹어도 되지만, 만드는 법이 크게 어렵지 않으니 이번 기회를 통해 애정을 가득 담아 뭉근히 끓인 뱅쇼 한 잔을 나누며 주변 지인 혹은 가족과 함께 훈훈한 연말을 맞이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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